대영박물관
3조2000억달러 vs -43억달러
유럽 특파원 시절에 대영박물관의 특별한 서고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일반인에겐 공개하지 않는 이 서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피카소 등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유명 화가들이
손으로 직접 그린 스케치를 보관해 둔 곳이었다.
방의 사면이 서랍장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학예실장이 미켈란젤로의 스케치가 담겨 있는 서랍을 열어 보여주었다.
목탄으로 밑그림을 그린 듯한 스케치가 수십 장 쌓여 있었다.
"한 장 얼마 정도 가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글쎄요… 최소 100만파운드(약 18억원)는 하지 않을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예실장은 그 방에 있는 대가들의 스케치를 다 모으면 수만 장에 이른다고 자랑했다.
2011년 가을, 유럽 재정 위기를 취재하러 이탈리아로 출장을 갔다.
경제 부처 차관을 만나 "부채가 너무 많아 국가 부도가 불가피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차관은 이런 답을 내놓았다. "베네치아에 있는 집 한 채가 얼마인 줄 아느냐.
4~5층짜리 저택이면 1억유로(약 1500억원)이다.
와인 산지로 유명한 토스카나 지방의 시골집 한 채는 기본이 100만유로(약 15억원) 이상이다.
우리 자산이 이렇게 많은데 국가 부도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리 경제가 성장 동력을 잃고 장기 저성장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많은 국민은 우리나라가 그래도 되는 나라인 양 착각하고 있다.
이웃 일본은 20년 장기 불황에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버텼다.
그 이유는 과거 30년 호황기 때 벌어놓은 자산이 버팀목이 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외 순자산(대외 자산에서 대외 부채를 뺀 것)은 3조2000억달러(3월 말 기준)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대외 순자산은 마이너스 43억달러이다.
그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벌었지만 여전히 자산보다 빚이 더 많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한국 경제는 빚 많은 월급쟁이고, 일본 경제는 자산 운용 수익만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은행 프라이빗 뱅킹고객인 셈이다.
해외에서 굴리는 자산이 많다 보니 일본은 지난해 자본수지로만 연 46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우리나라의 자본수지는 2억달러 적자였다.
GDP(국내총생산) 규모로 보면 한국이 세계 13위 경제 대국이지만 착각해선 안 된다.
GDP는 한 해 국민이 번 총소득 개념이다.
현재 현금 흐름이 좀 좋다는 얘기지 재산이 많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빚이 많다고 해서 100% 망하는 건 아니다.
미국은 대외 순자산이 마이너스 5조달러에 이른다. 하지만 미국은 기축(基軸)통화국이다.
인쇄기로 달러를 찍어내기만 하면 얼마든지 빚을 갚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고, 전 세계 부자들이 열광하는 시골집도, 대가들의 스케치도 없다. 의지할 거라곤 지식과 노동뿐이다.
경제 회생의 기대를 한 가닥 걸게 했던 새 경제팀의 경기 부양책이 점차 모멘텀을 잃어가고 있다.
국회 등에서 발목을 잡아 이 대책마저도 약효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암울하다.
출발점은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나라를 뺏기는 치욕을 겪고도 분발하지 않아 아무것도 물려준 게 없는 선조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 김홍수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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