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Dvorak) / 유모레스크 7번
Dvorak / Humoresque No.7
유모레스크 / 드보르작
Dvorak : Humoresque in G Flat Major, Op 101 No 7
Violin : Itzhak Perlman
Cello : Yo Yo Ma
Seiji Ozawa conducting Boston Symphony Orchestra
Dvorak : Humoresque in G Flat Major, Op 101 No 7
Kyung Hwa Jung, Violin,
Peter Frankl, Piano
Antonin Dvorak (1841 넬라호제베스, 보헤미아-1904 프라하)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곡가.
푸줏간 겸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가업을 잇기 위해 일을 배우는 한편, 즐로니체 도시의
오르간 주자로부터 최초로 음악의 초보를 배웠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857년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한 그는 동시에 오르간주자, 피아노 주자로서의 기초적인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비올라 주자로서 콤자크 Kavel Komzak의 오케스트라에
들어갔고, 댄스 음악이나 레스토랑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1873년 국민극장 직을 떠나 프라하의 성 아달베르트 교회 전속의 정 오르간 주자가 되었고,
안나 체르마코바 Anna Cermakova와 결혼하여 6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는 장학금을 받아 빈에 가서 배웠으며 거기에서 브람스와 사귈 수 있었다. 브람스는 그에게
여러 가지 원조의 손길을 뻗쳐 주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자기가 거래하는 출판사인 짐로크에
그를 소개함으로써 드보르작의 모라비아 2중창곡, 슬라브 무곡집, 그리고 많은 교향곡이
짐로크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또 브람스는 그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게도 소개하였는데 뷜로는
이 음악가의 작품을 널리 세상에 알리고 온 유럽에 명성이 높아지게 힘써 주었다.
드보르작은 1890년에는 프라하에서 교향곡 제8번을 창작했다.
뉴욕 음악원을 창설한 Jeanette Thurber여사가 미국에서 국제 전보로 초청한 것에 응하여
1892년부터 1895년에 걸쳐서 이 음악원에서 지도를 맡았다.
그의 미국적 작품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의 하나가 교향곡 제9번이다.
이 작품은 1893년 1월 1일부터 5월 23일 사이에 써진 것이다. 교향곡 제9번의 초연은
같은 해 12월 16일 카네기 홀에서 독일인 Anton Seidl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드보르작이 이 총보에 <<신세계로부터 Z noveho sveta>>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바로
초연 직전의 일이었다. 1895년 5월 프라하로의 귀로에 오른 뒤, 그의 작품과 그의
체코적 착상은 그를 당시 음악의 중심 도시 빈과 베를린으로 향하게 했고, 그는 거기에서
아카데미 회원으로 지명되는 등 명성을 떨쳤다.
국가적 명사가 된 그는 1904년 5월 1일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그의 음악적, 정신적 유산은 오늘날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가 사로잡혀 있던 좁은 전통의
테두리를 넘어서고 있다. 드보르작은 분명히 피아노 연탄용의 16개의 슬라브 무곡집을
작곡했고 그 오케스트라판은 그의 이름을 널리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그의 예술을 브람스의 고전주의 발자취에서만 찾거나 슈베르트의 내향적 순수함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드보르작이 작곡 기교에서 중요한 공적을 남기지 않았다 해도,
그의 넓은 범위에 걸친 작품을 그저 낭만주의의 지방적, 민족적 발전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드보르작은 진짜 체코의 근대 음악에서 교향곡, 실내음악의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그저 슬라브 민속음악의 멜로디나 리듬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본질을 깨지 않고 폭넓은 고전 형식, 즉 교향곡, 협주곡, 3 중주곡, 4 중주곡의 틀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기품있는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초기부터 그가 실내악곡 방면에 힘을
기울인 것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즉 op. 1의 2대의 비올라를 위한 5 중주곡, 그것에
뒤이어 만든 최초의 4중주곡을 들 수 있다. 9개의 교향곡을 통하여 그중 초기의 4개의
교향곡은 사후에 유작으로 간행되고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 혹은
14개의 현악 4 중주곡을 통하여 작곡가의 전모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들 기념비적 작품은 최근까지 부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으며 그 곡들의 출판은
겨우 근래에 이루어진 것이다. 초기에는 단순한 착상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직인적 음악가였던
드보르작은 대기만성의 재능에 의하여 브람스와 어깨를 겨룰 만한 체코의 음악가가 되었다.
때로는 노스탈직하지만 결국은 낙천적인 그의 작품의 분위기가 그를 조국의 활기찬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는 변함없는 희망을 노래하는 보기 드문 시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