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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잡동사니

한국 대표 작가들이 말했다, 여긴 꼭 가보라고 (인천 북성포구)

by DAVID2 2017. 4. 18.

"고향이 어디냐고요? 인천 짠년인데요"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난 꼭 그런다. 저요? 인천 짠년인데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보고 배운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짠에 년까지 붙이고 마는지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부지불식간에 툭 튀어나가는 습관이니 태생적인가 하면서도 실은 발음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게도 되는바,
이 대목에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부분은 어쨌거나 내가 지갑 열기의 선수라는 거다.
그러니까 자린고비의 그 소금이 아니라 인천 앞바다의 그 소금에 혀를 대는 게 나란 거다.

인천 북성포구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나 더는 인천에서 먹고 자지 않는 나는 그런데도 종종 인천에 간다.
평생 인천 남구에 둥지를 틀어온 부모님이 여직 그곳에서 여전한 둥지를 지키며 살아가는 까닭이다.
인천에 가면 집 말고는 참 갈 데가 없어 하면서도 나는 아빠를 앞장세워 집을 나서기 일쑤다.
73년 인천 토박이를 따라 자주 가던 인천 곳곳을 산책할 적에 드는 익숙한 편안함이 추억을 빙자한,
꽤 누릴 만한 사치 같기도 해서다.

시인 김민정 추천, 인천 북성포구

 
특히나 평생 노동자로 근무한 동일방직을 중심으로 동구 안팎을 다닐 때면 유난히 목소리가 커지는 게 아빠다.
어린 나를 무동 태워 신나게 드나들던 단골 가게에 작정하고 들를 때면 더더욱 목청을 높이는 게 아빠다.
몇 대에 걸쳐 이어지는 가게마다 고주망태 아빠를 기억하는 부엌 할머니들이 꽤 있었으니, 어느 날은
대구탕 할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와 아빠를 와락 끌어안았고, 어느 날은 주꾸미 할머니가 아빠를 보고 주저앉아
눈물 바람인 적도 있었으며, 어느 날은 중국집 할머니가 아빠에게 고기 튀김 한 접시와 고량주 두 병을 품에
안긴 적도 있었다. 돈깨나 뿌린 덕분이지, 안 그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뻘 되는 가게 주인아주머니는
죄다 양어머니 삼던 아빠의 연한 기질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나는 아빠만의 분명한 미각에 더한 신뢰를 품어왔다.
 최소한 맛없는 집은 두 번 다시 안 가는 단호함이 또한 아빠에게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아빠랑 자주 술을 마시고 북성포구에 걸으러 다녔다. 초입에 조개 까는 할머니들 보러 간다는 게 핑계기도 하였지만
실은 아빠랑 걷고 싶어 북성포구에 가곤 했는지 모른다. 북성포구라 쓰인 간판을 따라 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쇠락한 횟집 몇이 있고 그 옆으로 난 바다가 보인다. 물이 차면 유한락스 통이나 사이다 병이나 검은 튜브가 둥둥 떠 있는
바다지만 물이 빠지면 살이 어지간히도 쪄서 뒤뚱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갈매기들 천지가 되는 검은 땅.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북성포구라 하면 그게 다다. 실은 그 별것 없음을 확인하는 일이 북성포구를 다녀가는 일의 전부다.
작년 여름에는 공연히 지는 노을이 너무 빨갛다 싶어 그 노을 사진만 200장을 넘게 찍어가며 소주 두 병을 비우고 온
적이 있었고, 지난겨울에는 북성포구 입구에 쌓아 놓은 검은 새 연탄들 옆에 다 타가는 희뿌연 연탄을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고만 온 적도 있었다. 그냥 그래보고 싶은 어떤 순간들에 충실해져보는 자유, 그 거리낌 없음.
무엇을 보겠다는 작심이 없으니 가볍고 빈 마음인데 그러다보니 무언가를 채워서 가게도 되는 곳, 그곳이 내게는 북성포구다.
턱없이 허탈한 발걸음 속에서 사는 일의 헛헛함을 재확인시켜주는 곳, 그럼으로 되레 안팎으로 건강한 정신을 갖게 해주는 곳,
그곳이 내게는 북성포구다. 아마도 예닐곱 편을 시로 쓰지 않았나 싶다. 산문이야 이리 흔하고.
 
김민정(시인) 
 
작가 약력  
1976년 인천 출생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산문집으로『각설하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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