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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클래식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by DAVID2 2021. 9. 30.

Marian Anderson / Ave Maria (Schubert)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세계 최초의 흑인 오페라 가수이자 미국의 위대한 여자 성악가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는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 1897~1993).

1955년 미국, 쉰 살이 넘은 나이에 흑인 가수로는 처음 메트로폴리탄에서

영감 있는 노래로 관중을 사로잡은 여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참하고 가난한 가정이었지만, 음악을 즐기는 가정 속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성악가의 소질을 키워 나갔습니다.
자신이 노래하던 교회 성가대에서 모아 준 돈으로 처음 성악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후에 성악가 대회에서 3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승을 합니다.
온갖 냉대와 가난과 인종차별의 멸시를 이기고 미국 성악계의 찬란한 별로 

여러 차례 세계 각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습니다.

한번은 백악관에서 루즈벨트 대통령 부처와 영국여왕을 위하는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성공리에 공연이 끝난 자리에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앤더슨이 대답하기를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늙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남의 
집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관객들의 기립박수도, 온갖 영예로운 상도 아니었습니다.

성악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1939년 마리아 앤더슨에게 미국 애국 여성회가 

그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워싱턴 DC에 있는 컨스티듀션 홀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처사에 대한 항의로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연주를 강행하였고, 

그녀에 대한 지지로 그날 무려 7만5천명의 청중이 운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서 그녀는 연주여행 도중 스케줄이 잡힌 호텔에서 투숙을 거부 

당하기도 했고, 받아주는 식당을 찾지 못해 식사를 거르고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항상 사람들을 돕고 웃음을 잃지 않은 그녀는 어디서나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연주여행에서 만난 한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그녀에게 사인을 부탁했습니다.
사인을 하며 앤더슨이 학생에게
"오늘 저녁 음악회에 오실 거죠?"
라고 물었더니, 학생은 돈이 없어 가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아베마리아"를 불러주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1953년 한국전쟁 때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 그녀가 부산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피난지 부산에서 마땅한 연주회장을 찾기 어려웠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앤더슨은 초등학교의 운동장에서 피난민들을 위해 노래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녀가 미국의 조그만 도시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을 때의 일화입니다.

가난한 한 흑인 소녀가 새벽부터 호텔에서 잡일을 하다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만 호텔의 구석에서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 소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 앞에 한 중년이 흑인 여성이 서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소녀에게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너는 많이 외로워 보이는구나!”

그러자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네, 오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마리안 앤더슨의 공연이 근처에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일을 해야 했기에 갈 수 없었어요.”

그러자 여성은 소녀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들은 소녀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마리안 앤더슨이군요.”

그녀의 노랫소리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다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박수와 춤으로 화답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당신이 부르는 노래 한 소절이,
당신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당신이 행동하는 작은 선행이,
누군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래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작은 선행이 한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매리언 앤더슨(Marian Anderson, 1897년 2월 27일~1993년 4월 8일)은 미국의 성악가로 20세기

최고의 여성 알토로 꼽힌다. 흑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선 가수이다. 

앤더슨은 필라델피아 빈민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백화점의 냉동실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죽자 그녀의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앤더슨의 재능을 알아본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레슨을 받을 수 있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음악학교 지원에 떨어졌다.

1925년 앤더슨은 성악가 주세페 보케티에게서 레슨을 받게 되었고 같은 해 뉴욕 필하모닉이 후원하는

콩쿨에 합격해 8월 26일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을 했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그녀는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19287년 카네기 홀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1930년대 전반에는 유럽 각국에서 116회에 달하는

순회 공연을 가졌고 1935년 흑인 최초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무대에 섰다.

당시 이 공연을 본 아프투로 토스카니니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그녀는 백년에 한 번 나올만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오늘 그녀를 만난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드린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여전히 앤더슨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차별 대우를 받았다. 1939년 앤더슨은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공연장 측에서 돌연 공연 취소를 통고했다. 앤더슨은 항의 표시로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무료 야외 연주를 가졌고 7만 5천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그 외에도 호텔에서 투숙을

거부하거나 식당에서 출입을 막는 등 차별을 겪었다. 1941년 가장 자랑스러운 필라델피아 시민에게

수여하는 보크 상 수상자가 된 매리언은 상금 1만 달러로 장학 재단을 만들었다. 

1943년에는 건축가 오피어스 피셔(Orpheus Fisher)와 결혼했다. 195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지배인 루돌프 빙은 앤더슨에게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 무도회》의 점쟁이 울리카 역을 제의했다.

비중은 물론 출연 횟수도 적은 역이었지만 앤더슨은 그의 제의를 수락했고 그녀 이후 비로소 흑인

가수들이 오페라 극장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앤더슨은 1993년 조카 제임스 디프리스트의 집에서 96세로 숨을 거뒀다.

 

Bach / Erbarme dich, mein Gott (Matthäus-Pa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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