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셈법’ 모르는 바보들
정국 경색. 요즘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내 주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워낙 길들여져 그렇지 사실 ‘경색’ 그 자체는 얼마나 치명적인 병증인가.
비근한 예로 뇌경색이 오면 뇌 기능에 이상이 올 뿐 아니라 신체 어딘가에 심각한 마비가 수반된다.
그럴진대 이런 현상이 범국가적으로 초래된다면 서민들의 폐해와 고충은 얼마나 크다 할 것인가.
경색은 ‘꽉 막혔다’는 뜻인데, 결국 ‘불통’이란 말이 되겠다. 여기서 ‘통(通)’은 본디 쌍방향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불통’의 책임 역시 실체적 사실에 부합하게 쌍방향적으로 분배되는 것이 옳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책임을 상대방에게만 돌리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그래 혀만 끌끌 차고 있는 노릇인데, 묘책의 힌트처럼 엉뚱한 이야기가 하나 떠오른다.
바로 ‘행복한 바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중동의 성자 나스레딘(Nasreddin)의 일화다.
한 남자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첫째는 내가 갖고 있는 낙타의 반을 가져라. 그리고 둘째는 3분의 1을 갖고, 막내는 9분의 1을 가져라.
대신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나눠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는 낙타는 17마리였다. 세 아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나스레딘이 지나가며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러곤 자신의 낙타 한 마리를 그들 낙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낙타는 이제 모두 18마리가 됐다.
나스레딘이 말했다. “첫째는 반을 가져야 하니까 9마리, 둘째는 3분의 1이니까 6마리, 막내는 9분의 1이니까 2마리를 가지면
모두 17마리가 되죠? 그러면 한 마리가 남는데, 이것은 알다시피 내 낙타니 도로 가져가겠소.”
나스레딘은 유유히 자신의 낙타를 타고 길을 떠났다.
‘숫자 놀음’ 같지만 이 이야기에는 오묘한 ‘심리 게임’이 숨겨져 있다. 그 과정을 곰곰 추적해 보면 재미있는 심상이 드러난다.
첫째 아들이 자신의 몫인 ‘절반’을 계산하려고 17을 나눠 보니 딱 한 마리가 모자란다.
둘째와 셋째 아들이 제 몫을 챙기려 해도 한 마리가 문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없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자신의 한 마리를 보탠다는 발상을 일반인들은 알면서도 못한다. 아니 안 한다. 왜?
일단 자신의 것을 잃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움찔해지는 순간 아닌가.
하지만 바보 나스레딘은 안타까운 생각에 자신의 낙타를 그들에게 ‘줄’ 요량으로 과감하게 한 마리를 넘겨준다.
그리고 계산을 해 보니 마지막엔 다시 한 마리가 남는다.
그는 주면서 착한 일을 하고 큰 기쁨을 얻었을 뿐 아니라 덤으로 한 마리를 되찾는 격이 된다.
심리적으로 한 마리를 ‘그냥 주겠다’는 마음을 품지 못하면 누구도 이 난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나스레딘의 바보 셈법은 더욱 귀하고 위대한 것이리라.
어쩌면 이 이야기 뒤에는 아버지의 속 깊은 의중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식들에게 ‘바보 셈법’을 익히게 해 줘 화목하고 행복한 삶의 길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심산 말이다.
만일 우리가 바보의 저 셈법을 익히 구사할 줄 알면 오늘 이 세상은 보다 풍요로울 것이다.
이상과 다른 게 냉엄한 현실임을 잘 안다.
하지만 통 큰 나눔, 통 큰 양보, 통 큰 협상이 적시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날이 가슴 쓰리게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
중앙Sunday 제348호 | 2013111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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