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아름다울 수 있잖아
"점심 먹자." 그 친구가 내게 전화한 것은 2년 전쯤이었다. 중학교 때 만나 한결같은 우정으로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친구 넷이서 식사를 맛있게 하고 느긋하게 차를 한 잔 마시려는데, 그 친구가 느닷없이 말했다.
"나 일년 후에 죽는대." 우리는 모두 스톱모션이 돼 버렸다. 췌장암인데, 이미 손을 쓸 수가 없게 돼 버렸단다.
정작 본인은 담담한데 나는 손이 덜덜 떨리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 뒤 1년 동안 그 친구는 침착하게 죽음을 준비했다.
전화도 자주 했다. "인천 가자." "강화도 가고 싶어." "냉면 먹자."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원 없이 옛날 얘기를 나눴다.
만날 때면 나눠 줄 옷가지나 물건을 들고 오기도 했고, 떠나고 난 뒤를 위해 남편한테 부엌일을 가르친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 친구가 죽는다는 걸 실감할 수 없었지만, 예언처럼 친구는 준비를 다 끝내고 저세상으로 훌쩍 가 버렸다.
빈소는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병원이 아니라 다른 병원에 있었다.
친구 딸이 울면서 말했다. "엄마가 국밥이 맛있고 주차장 시설도 편리하다고 꼭 이곳으로 하라고 하셨어요."
요즘 부쩍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다. 나이도 웬만하고, 몸 상태도 예전만
못해지면서다.
나도 그 친구처럼 그렇게 갔으면 좋겠다 싶고, 혹시 내가 죽을병에 걸리면 병원에서 내 몸에 주렁주렁 주삿바늘 꽂고
코나 목에 무슨 관 잔뜩 끼우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우리는 태어나는 건 축복하면서 돌아가는 건 왜 그렇게 쉬쉬하고 말도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내 아이들도 내가 몇 살쯤 가고 싶다거나 어떻게 가고 싶다는 말만 꺼내도 질색을 한다.
이제 우리도 자연스럽게 '어떻게 돌아가는 게 편안하고 아름다운지' 본인과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날, 나는 어느 호스피스 병원에서 편안하고 품위 있게 가고 싶다, 딸들아―.
그래서 이번 어버이날 우리 모여서, 엄마가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할지 머리 맞대고 의논해 보자.
손숙, 배우
[조선일보, 일사일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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