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delssohn / 'on Wings of Song' Op.34-2 멘델스존 / 노래의 날개 위에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멘델스존의 가곡은 베를린 리트악파(樂派)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절도 있는 시의 해석과 유절형식(有節形式)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어,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고, 섬세하고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슈베르트와 같은 새로운 수법을 구사하고 있지 않아 이 곡만은 독일가곡 가운데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바이올린곡 등으로 편곡되어 자주 연주된다. |
조수미 |
Felix Mendelssohn (1809 함부르크-1847 라이프찌히) 작곡활동, 지휘자나 독주자(피아노, 오르간)로서의 연주회 활동, 여행, 회합이나 서신에 의한 사람들과의 교제 등, 이 무렵의 멘델스존의 생활은 활기에 넘쳐 행복한 것이었다. 첫 아들 칼 볼프강 파울 Carl Wolfgang Paul은 1838년 2월 7일에, 마리 Marie는 1839년 10월 2일에 탄생했다. 1840년 9월, 여섯 번째의 영국 체재 후 멘델스존을 베를린에 묶어두고 싶었던 프로이센 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요청에 의하여 주저하면서도 경의를 가지고 1841년 프로이센 왕의 예배당 악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베를린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아내를 동반한 일곱 번째의 영국 체재 때에는 빅토리아 여왕을 두 차례에 걸쳐서 알현했다. 1843년 처음으로 라이프찌히에 손수 음악학교를 설립, 영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거기서 작곡(슈만도)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후 라이프찌히와 베를린을 자주 왕래했다. 1843년 10월 18일 포츠담에서 한여름밤의 꿈 전곡의 초연 후 1844년에야 겨우 프로이센 왕으로부터 일거리의 경감과 거주의 자유를 인정받아, 1년간의 휴양을 취할 것을 결정한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올린 협주곡 op. 64를 완성했다. 그러나 건강상태가 나빠져 다비드 Ferdinand David(이 곡은 그에게 바쳐졌다)가 연주한 1845년 3월 13일 라이프찌히에서의 초연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라이프찌히에서는 덴마크의 작곡가 닐스 게제가 멘델스존을 보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오르간을 위한 6개의 소나타, 피아노 3중주곡 c단조, 현악5중주곡 B장조, 무언가집 제6권, 1846년에는 오라토리오 엘리아스(초연 1846. 8. 26. 버밍검) 등 많은 곡들이 작곡되었다. 1847년 4월, 영국에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체재에서 엘리아스를 여러 차례 지휘하고, 베토벤의 제4협주곡을 훌륭하게 연주했다(그는 이것은 나의 장기이다 Mon vieux cheval de bataille라고 프랑스어로 말했다). 런던에서 스웨덴의 젊은 가수 예니 린드의 첫 무대에 입회한 후(그녀와는 1844년에 베를린에서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누나 파니의 돌연한 죽음의 소식을 접한다.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낀 그는 충동적으로 현악4중주곡 f단조 op. 80, 이어 아름다운 밤의 노래 Nachtlied, 새로운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일부를 만들었다. 여행을 하고 데생이나 그림을 그렸으며, 때로는 건반을 접하는 일도 있었으나 건강이 쇠퇴하자 오랫동안 무기력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라이프찌히로 돌아와 1847년 10월 3일 자신의 음악원의 최초의 학생의 한 사람인 16세의 요아힘이 바이올린 폭넓은 교양을 가지고 있었고, 인생을 사랑하며 사람을 매료시키는 동시에 또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특성인 자유분방함을 좋아하는 경향과 멘델스존과의 사적 서한을 파기해버렸지만 마그누스, 클링게만, 모셸레스 같은 친구와 교환한 방대한 서신 덕택으로 부르주아 생활의 규율이 멘델스존에게는 조금도 분위기를 벗어나고 파리에 실망했다 하더라도, 멘델스존은 도처에서 작곡가, 지휘자 혹은 피아니스트로서 시대의 총아였다. 베토벤이나 특히 바흐, 모짜르트의 연주는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휘대에 올라서면 악단원을 고양시키고 동시대의 작품뿐만 아니라 과거의 잊혀지거나 간과되었던 작품에 눈을 뜨게 했다. 독일이 J. S. 바흐를 재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그 작품을 소생시킨 멘델스존 덕택이었다. 또한 그는 친구들, 그 중에서도 슈만의 새로운 작품 등도 연주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슈만은 멘델스존이 슈베르트의 사후에 실현한 그 제9교향곡의 초연(1839. 3. 22)에 힘이 되기도 했다. 과거에의 애착, 고전주의나 완성된 것에의 기호와 결부되어 새로운 것에 개방적이었던 멘델스존의 정신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시도해 온 그의 음악 속에도 나타나 있다. 20년간의 창작활동 속에서 어느 시기의 작품에서도 천재라는 표시를 발견할 수 있지만, 어쩌다 섞여 있는 평범한 작품 때문에 멘델스존은 부당한 평가를 받아 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멘델스존을 2류의 음악가로 간주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의 생활이 언제나 물질적으로 풍요했던 것을 사람들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집을 프랑스어로 X말 없는 연가집이라고 부름으로써 그의 음악 전체를 유약하다고 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한여름밤의 꿈이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교향곡 이탈리아나 스코틀랜드 등 잘 알려진 작품도 한다. 현악8중주곡 op. 20, 현악4중주곡 op. 12, 13, 40, 80, 현악5중주곡 op. 87,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협주적 변주곡 op. 17 및 20곡 이상의 가곡과 같은 작품이 이탈리아, 그리고 특히 그의 제2의 조국인 영국에서 귀중한 자극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극히 독창적인 영감, 교묘한 테크닉, 세련된 음악성과 오케스트레이션, 작품의 다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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