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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잡동사니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 (3/3)

by DAVID2 2024. 2. 21.

 

 

 3.가난한 독립운동가

 

사업가 집안의 막내딸로 자란 나에게는 낯선 미국에서의 궁핍한 결혼생활이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것이었다.

생활이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남편은 언제나 그분 특유의 유머로 사람들을 곧 잘 웃기고 여유를 보이는 낙천가였다.

[굶을 줄 알아야 훌륭한 선비이며 봉황은 아무리 배고파도 죽순 아니면 안먹는다]는 한국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던 남편으로부터 나는 가난한 생활을 품위있게 이겨내는 지혜와 절도를 배웠다.

 

한국독립지도자의 위신을 지키며 모든면에서 남모르는 내핍생활을 지속했던 독립운동시절에 우리는 하루 두끼를

절식할 때도 있었다. 나와 단 둘이 식사할때는 남편은 늘 기도를 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을 우리동포 모두에게

골고루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루 한끼의 식사에도 감사하며 머리숙여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하게 느껴져서 목이

메인 일이 이제는 먼 옛날 얘기가 되었다.

 

신혼시절의 내 꿈은 하루속히 한국이 독립되어 고달픈 독립운동가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아담한 내집을 갖는 것이었다.

지금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때면 워싱턴에 살던 시절 남편과 함께 눈을 치우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는 이웃집

고용인들의 눈에 띄지않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집앞의 눈을 치웠다. 그당시 주인이 직접 눈을 치우는 집은 우리집

단 하나 뿐이었다.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남편과 같이 했던 일은 내 가슴속에 줄거운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독립운동 하느라 밤낮없이 넓은 미국땅을 누비고 다닐때 였다. 남편은 이곳저곳의 강연시간과 방송이나 신문

기자와의 약속시간에 대느라고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태풍처럼 질주했다.

 그의 과속운전은 먼거리를 짧은 시간에 가야하는 바쁜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껏 달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혁명가적 기질 탓으로 보였다.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 위해 남편이 차를 몰고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달리던 때의 일이다.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남편은 그 격렬한 과속운전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러워서 과속을 제지했지만 남편은 아랑곳없이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켠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마구 달렸다.

곧 두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차의 뒤를 따라왔다. 남편은 더욱 무섭게 속력을 내며 달렸다.

나는 간이 콩알만해지고 등과 손에 땀이 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으나 남편은 태연하고 의기양양했다.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끝까지 따라왔던 두대나 되는 기동경찰의 오토바이에 붙잡히지 않은채 남편의 차는 정시에

프레스클럽 강연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연단에 올라서서 열변을 토하며 청중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수십번 박수갈채를 받았다.

강연장 입구에서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벼르고있던 두대의 기동경찰도 어느새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남편의 연설에 무척 감동된 모양이었다.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 남편을 붙잡을 생각도 않고 나에게 다가와서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기동경찰 20년에 우리가 따라잡지못한 유일한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 한사람뿐이오.

더 일찍 천당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시키시오]하고 그들이 남편을 향해 승리의 신호를 보내고 웃고 돌아가자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때부터 자동차 운전만은 꼭 내가 해야되겠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남편으로부터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겨우 [살았구나] 하고 정신이 드는 남편의 차에는 나 이외엔 누구나 타기를

꺼렸다. 그러나 내가 운전할때는 비단결 처럼 곱게 몬다고 남편은 나를 [실키 드라이버]라고 불렀다.

 

운전대를 잡으면 폭풍 처럼 격렬하게 달리지만 붓글씨를 쓰거나 시를 지을때는 남편은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했다.

늘 젊고 건강했던 남편의 특이한 성품은 무엇에나 열중하면 그일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책을 보거나 붓글씨를 쓸때

한번 정신을 집중하면 옆에서 창문이 깨져도 몰랐다.

 

일평생을 온갖 풍상 다 겪으며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해온 남편이 그토록 건강했던 것은 늘 자연을 벗삼아 자유롭게

지내는 어릴적부터의 생활습관과 편안하고 욕심없는 마음가짐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낚시질 할때는 고기를 낚아서는 도로 놓아주고 오직 낚시질만을 즐겼다.

남편이 항상 낚은 고기를 도로 물에 놓아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은 [왜 애써 잡은 고기를 놓아주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남편은 "나는 고기를 잡으려고 낚시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낚시를 즐기려고 낚시질을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항상 바쁜 일정을 나누어 주말이면 남편은 한국학생이나 동지들과 낚시하러 포토맥 강변이나 호수가로 나갔다.

미국에서 낚시할때면 남편은 가끔 한강변의 광나루 낚시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와 함께 미국 각지를 돌아다닐

때도 남편은 늘 자기고향의 아름다운 풍경과 정겨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려서 연날리기하며 뛰어놀던 남산과 복숭아꽃이 만발하던 고향집과 동네 과수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따먹던 복숭아와 사과 얘기를 할때는 마치 소년 같았다. 어디 가나 남편은 철따라 나무와 꽃가꾸는 일에 열심이었다. 남편이 어찌나 나무와 꽃을 사랑하고 잘가꾸는지 일류 정원사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남편을 아는 수목전문가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일을

남편에게 물어오기도 했다.

 

남편은 늘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사람은 흙을 밟으며 흙냄새를 맡아야 건강하게 오래산다]고 하면서 [항상 우리나라의 나무와 흙을 사랑하고 자연을 벗하라]고 일러주었다. 남편은 미국이나 하와이의 동포어린이들과 함께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을 잘 불렀고 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가려고 누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님편은 늘 [욕심내고 화내고 남을 미워하는 것이 건강에 제일 해롭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말했다. 건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비결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히 갖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남편은

말해주었다. 미국에서 남편은 많은 사교모임에 나갔지만 술과 담배는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청년시절 집안 어른들로 부터 술 마시는 법을 배웠다는데 구국운동할때부터 술과 담배를 끊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해방후 귀국해서 가끔 윤석오씨와 이기붕씨 집에서 정성껏 담가보낸 막걸리를 [불로장수주]라고 남편은 나에게도

조금씩 권하며 즐긴적은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후 [굶는 국민이 있는데 어찌 쌀로 만든 막걸리를 마실수가 있겠는가]고 막걸리는 물론 다른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언젠가 어느 애주가 친척이 와서 나에게 [만일 대통령이 술을 좀 마셨더라면 한국의 역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술과 담배가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우리 역사에도 보탬이 됐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남편은 가슴에 울분이 쌓이면 장작을 열심히 팼다.

장작패는 일은 남편이 젊었을 때부터 해왔다고 했다.

약소민족의 지도자로서 나라없는 설움과 냉대를 받으며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려 온 남편에겐 장작패는 습관이야 말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건강을 지켜준 비결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화나 울분은 참는 것보다 빨리 풀어야 건강에 좋다고 한다. 독립운동하던 시절이나 대통령 재임시나 남편은 틈나는 대로 나와 함께 맨손체조를 하거나 산책을 했고 정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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