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교훈
골목 안 후미진 자리에
세월 녹여 덧댄 판자로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국밥집이 있었는데요
맛에 최고의 비법은 세월이었다며
가는 세월 오는 세월 넣어
끓인 국밥 한 그릇이 주는 힘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할머니요….
여기 국밥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할머니….국밥 세 개요"
세월에 뜸 들인
햇살 한 움큼 달빛 한 조각 넣어 끓인 국밥 한 그릇에
오늘을 살아갈 용기가 난다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저녁 무렵
땅거미 진 어둠을 가녀린 두 어깨에 올리고 남자가 들어서는데요
"할머니요….
여기 국밥 하나랑 소주 한 병 주세요 "
"요즘 통 안 보여서 살만한가 했더니
소금에 절인 배추가 되어 왔노"
오랜 단골인 듯한 익숙함에
두어 번 농담을 더 주고받는 사이
펄펄 끓는 국밥 한 그릇을 남자 앞에 내어놓은 할머니는
"와….
하는 일이 잘 안 풀리나?"
"봐서 문 닫으려고요"
견디기만 하는 삶은 삶이 아니리는 듯
남자는 소주 두 어잔을 입속에 털어 넣고는
김이 식은 국밥을 바라보더니
"할머니요….
앞전엔 고기를 수북하게 올려주더니
오늘은 파만 한가득이네요"
오후에 해님처럼 지긋이 웃고 있는 할머니와는 달리
이리저리 숟가락질하던 남자는 국그릇 맨 밑에 놓인 고기를 보고는
"고기가 밑에 다 있었네요"
미안한 듯 엷은 미소를 머금은
남자에게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데이…."
며칠 후
소곤소곤 내리는 가을비를 안고
허공을 이고 선 바람 따라 다시 국밥집에 들른 남자는
'"할머니요….
국밥 한 그릇만 주세요"
그날도 어김없이 국밥 위에 놓인
파를 보며 흐뭇하게 숟가락질하던
남자는 아무리 뒤져봐도 고기가 보이질 않자
"할머니요….
어찌 오늘은 국밥 맨밑에도 고기가 없습니까?"
할머니는 남자의 그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는 듯 미리 준비한 고기를
국밥에 넣어주고는
"아는 게 다가 아니데이."
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며칠이 더 흐른 해묵은 오후
지친 걸음을 따라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할머니요….
여기 국밥이랑 소주 한 병만 주세요"
지난날의 그날처럼 똑같은 메뉴를 시키고는
김이 식은 국밥보다 버텨온 인생 한입 속에 나올 푸념을 만들어 줄
소주 한 병을 단숨에 마셔대더니
게슴츠레 뜬 눈으로
옆 테이블에 앉은 형제로 보이는 아이 둘이서
국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는 걸 보고는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형제에게 내밀어주며
"많이 먹고 훌륭한 사람 돼야 한데이" 라며
나눔으로 되돌아오는 행복을 알고 있다는 얼굴로
지난 슬픔을 지워내고 있는 걸 본 할머니는
수육 한 접시를 내밀어주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쥘 때보다 펼 때가
더 많이 들어오는 법이데이.." 라고요
눈물을 기둥 삼아 버티던 남자는 알게 되었습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인 양 의스대던 그때를….
내가 알고 있는 게 다인 양 우쭐대던 그때를….
내 것인 양 모든 걸 움켜쥐려고만 했던 그때를….
할머니가 내밀어 주는 국밥 속에
삶의 진리가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된 남자는
할머니에게 머리 숙여 깊은 인사를 건네고는
어둠을 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시작이라며…
<출처: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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