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곰팡이-산책시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일러스트:잠산 |
이문재(49) 시인의 시들은 치열하고 내부가 끓고 있다. 그의 시들은 결사(結社)를 한다.
주로 도시와 문명의 급소를 공격해 단숨에 제압한다.
시 '푸른 곰팡이'가 실려 있는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1993)은 시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도시적 공간의 무서운(파시스트적인) 속도에
대항해 '게으르고 어슬렁거리고 해찰하는' 8편의 산책시(散策詩) 연작을 발표한다.
그는 '아파트단지가/ 웨하스처럼, 아니 컴퓨터칩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는 곳을 느릿느릿 걷는다.
그는 '도시는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느림보는/ 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 도시에서 당하고 말지요/ 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마지막 느림보-산책시 3')라고 썼다.
시 '푸른 곰팡이'에서도 느림을 예찬한다. 사랑도 산책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이 산책 같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랑은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이지만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을 살면서 사랑은 무르익고 완성된다는 뜻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 보라.
아무리 격렬한 사랑에 휩싸인 사람일지라도 백지를 앞에 두면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림이 편지의 미덕. 지우고, 생각을 구겨버리고,
파지(破紙)를 내는 시간에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나흘을 또 기다려 보라. 나의 편지가 사랑하는 이의 안뜰과 마루와 품에 전달되기까지의
그 시간을 마른 목으로 가슴 설레며 살아보라.
푸른 강이 흘러가는 그 기다림의 거리를 살아보라. 그러는 동안 사랑은 푸른 강의 수심처럼 깊어질 것이다.
요즘 이문재 시인은 따뜻한 체온의 '손'을 주목하고 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내미는 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근년에 발표한 시 '손은 손을 찾는다'에서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의 시는 도시와 문명에 단호하게 맞서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괸,
그리워하고 연민하는 사랑의 마음이 산다.
해설: 문태준·시인
입력 : 2008.01.29 01:00 / 수정 : 2008.01.2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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