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특별기획

20 세기를 빛낸 지휘자 /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by DAVID2 2013. 4. 27.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1962)

 

 

본명 브루노 발터 슐레징어(Bruno Walter Schlesinger)로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 지휘자이며 작곡가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원래 성은 '슐레징어'로, 1896년부터 발터라는 성을 썼으며 1911년 오스트리아 시민이 된다.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현재 베를린 예술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쾰른·함부르크 등 각지의 가극장에서 일하였다.

그러던 중 18세였던 1894년 말러와 만나게 되었다. 말러에 심취하면서 그는 말러의 영향에 의한 인기상승도 곁들여서

 점차로 두각을 나타내고, 1901년부터 1912년까지 빈 국립가극장의 지휘자로 있게 되었다. 이어 뮌헨 국립가극장,

베를린 시립가극장,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등의 중요한 자리를 역임하여 명성이 매우 높아졌다.

그러나 나치스의 압박에 쫓겨 1934년부터는 파리·런던 등지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1939년 뉴욕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미국에 정착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빈 필하모닉을 비롯하여 유럽의 오케스트라에도 객연(客演)할 기회는 있었으나,

레코드 팬들이 바랬던 빈 필하모닉에의 객연에 의한 녹음을 실현하지 못하고 1962년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스의 자택에서 85세로 사망하였다.

 

Mozart / Symphony No.40 (4악장)

Berlin Philharmonic (1932년)

 

Mahler, Symphony №4. (리허설 장면)

Concertgebouworkest, 1952.

 

Mahler, Symphony No. 1 in D major "Titan" (전악장 )

 

 

한오케스트라 단원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두 발의 총알이 든 총이 있고 당신 앞에는 '지휘자'와 '히틀러'와 '

스탈린'이 서있다. 당신이 누구든 두 사람을 골라 마음대로 쏠 수 있다면 누구와 누구를 쏘겠는가?"

단원은 서슴없이 답했다.
"지휘자! 지휘자에게 두 발 다 쏜다. 위와 같은 농담은 물론 카리스마의 극단을 치달은 20세기의 지휘자들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단원들의 지휘자에 대한 존경심 없이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브루노 발터. 이 지휘자야말로 앞서 말한 두 발의 총알을 피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감사와 겸손과 존경의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어갔다. 단원들의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 것은 두말할 나위없었다.

그는 한편 일상의 인간들에게 평범하게 내재된 소중한 정감과 서정을 통해 고귀한 영혼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성선설적 음악혼'이 가장 소박하고 따스한 모습을 통해 가장 높은 경지를 드러내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제 어느 곡을 들어보아도 그의 음악에는 모나고 각진 곳이 없다.

발터의 본명은 브루노 발터 슐레징거다. 베를린에서 유태인의 후예로 태어난 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1889년 13세 때 베를린 필과 협연까지한 그가 피아니스트가 아닌 지휘자가 된 것은

당시 한스 폰 뷜로의 연주를 듣고서 한눈에 반해 버린 탓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운명적인 만남이 그를 맞이했다.
1895년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에 부지휘자로 가면서 말러를 만난 것이다. 그는 말러의 충고로 슐레징거라는 유태계

성을 버렸고, 말러를 따라 빈 필의 부지휘자로 간다. 웬만하면 홀로서기를 주장해도 좋을 시점까지

그는 말러를 섬겼다. 그의 죽음 뒤에도 발터는 평생토록 말러를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1913년에 뮌헨 오페라극장, 25년에 베를린 시립오페라극장을 맡았던 그는 1929년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이 된다. 독일에서도 가장 인정받는 지휘자 중 한 사람이 된 그에게 곧 시련이 닥친다.
1933년 나치가 들어서며 유태인인 그의 활동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1936년에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옮겼으나 나치의 마수는 오스트리아마저 삼켜버렸고, 그는 결국 유럽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9년 미국땅에 닻을 내린 그는 이미 63세의 거장이었다. 이로부터 그는 뉴욕 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56년, 고령으로 은퇴했으나 CBS가 당시 개발된 스테레오 녹음에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콜롬비아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다. 삼고초려 끝에 복귀한 80대의 발터가 남긴 녹음들이 오늘날 그의 명반이 되어 남아 있다.

모차르트 후기 6대 교향곡과 브람스 교향곡 전집(소니, 59∼60년)이 그중 대표적인 것이다.
한편 캐슬린 페리어와 공연한 말러 '대지의 노래'(데카, 52년)는 기념비적인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