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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클래식

21. 낭만 (Romantic) 음악 / 중기 낭만파 - Mendelssohn

by DAVID2 2014. 3. 23.

 

 

낭만파 (Romantic Period)음악

1815-1910년 사이의 클래식 음악을 일컫는다.
이 시기의 음악을 간단히 고전파의 음악과 비교해보자면: 고전파의 양식과 규칙, 그리고 소나타 양식보다는 개인의

 감정, 보다 작은 규모 (소나타보다 훨씬 짧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의 음악 형식, 보다 반음계적인 화음의 사용 등이

중시되었던 시대이다. 심포니에서도 한악장짜리 교향시, 혹은 "표제"를 가진 음악 (Program Music) 등이 성행하였다.

관점에 따라 베토벤 중기나 후기의 음악을 낭만파 음악으로 볼 수도 있고, 작곡가들이 갑자기 "난 낭만파 작곡가야"

하고 작품을 썼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의 구분은 몇년-몇년 하는 식으로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기악 솔로곡이 훨씬 더 성행하였고, 지금의 연예인들만큼이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독주자 (겸 작곡가)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중기 낭만파
낭만의 꽃이 피기 시작한 시기로서 서정적인 작은 형식을 자유롭게 다루며, 자매예술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표현법으로 주관적인 사고로서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멘델스존 / 무언가 중 봄의노래 Op62 No6


멘델스존//비둘기의 날개 위에(O, for the Wings of a Dove)

Mendelssohn / A Midsummer Night's Dream 중 Wedding March

Moscow City Symphony "Russian Philharmonic"
Conductor -- Michail Jurowski

 

 

Violin Concerto e minor Op.64 (전악장)

Janine Jansen, Violin & BBC Orchestra

 

 


Felix Jakob Ludwing Mendelssohn-Batholdy (1809∼1847, 독일 작곡가)

 

멘델스존은 시의 세계를 피아노에 도입시킨 '무언가의 창시자'로서, 그의 작품은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대부분은 고전적인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나 《한 여름밤의꿈》,서곡《핑갈의동굴》,교향곡

《스코틀랜드》《이탈리아》등의 표제음악에서 볼 수 있는 회화성은 분명히 낭만적인 꿈과 시(詩)가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조부는 독일의 소크라테스라 불린 계몽주의 철학자 M. 멘델스존, 부친은 은행가 A. 멘델스존으로 유대인의 명문가계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미술·문학에서 타고난 재질을 발휘했고, 교양있는 양친을 비롯해 베를린의 뛰어난 예술가·

학자들의 지도를 받아 재능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1816년에는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 그 사실을

명시하기 위해 멘델스존 바르톨디라는 이름을 가졌다. 19년 이후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고, J.S. 바하의

대위법과 W.A. 모차르트의 고전적 양식을 이상(理想)으로 한 교육을 받았다. 21년에 J.W. 괴테를 방문한

이후에 5회의 방문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다. 25년에는 파리로 가서 직업음악가로서의 길을 선택했는데,

젊은 그의 사상에 큰 영항을 준 인물은 J. 파울·W. 셰익스피어·괴테 등이었고, 현악 8중주곡 내림마장조(1825)의

스케르초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발푸르기스의 밤>에 의거하고 있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존경심은 서곡

《한여름밤의 꿈》을 낳았다.

20세 때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거의 1세기 만에 부활·상연해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영국 여행의 인상은

《핑갈의 동굴》, 교향곡 제 3 번 스코틀랜드》로 결실되었다. 30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를 낳았다. 33년 뒤셀도르프에서의 니더라인음악제로 큰 성공을 한 그는 그곳 음악감독의

지위를 얻고 《메시아》를 비롯한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상연하였고, 그 영향에서 오라토리오 《성바울》과

피아노곡집 《무언가》의 대부분을 작곡하였다. 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의 제5대 지휘자로

취임하여 뒤셀도르프에 한정되었던 음악생활을 독일의 중심적 존재로까지 높였다. 바흐를 비롯한 오래된

음악의 소개와 함께 그 시대 사람들의 작품 연주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고, R. 슈만·N. 가제·L.H.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39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목사의 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얻었다.

43년 라이프치히음악원 설립에 공헌하였고, 스스로 원장직도 맡았는데, 성(聖)토마스교회 합창대장인

M. 하우프트만·슈만·F. 다피트·C.F. 베커와 같은 당대 일류 음악가를 교수진으로 맞는 데 수완을 발휘하였다.

라이프치히에 본거를 두고 뒤셀도르프·런던·베를린 등 각지에서 지휘자로서, 또한 피아노와 오르간 명연주가로서

활약을 계속했는데, 47년 5월에 누이의 죽음에 따른 충격 때문에 같은 해 11월 4일에 라이프치히에서 죽었다.

말년의 명작으로는 《바이올린협주곡 마단조(1844)》, 오라토리오 《엘리아(186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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