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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클래식

드보르작/교향곡 9번 e단조Op.95 '신세계에서'

by DAVID2 2012. 4. 9.

 

Dvorak / Symphony No. 9 in E minor, Op. 95

Largo 'From The New World'

드보르작/교향곡 9번 e단조Op.95 '신세계에서'  

 


Largo 'From The New World' 2nd Mov 

 

신세계 중에서 2 악장<꿈속의 고향>이라는 가사로 불리어지는 작품으로,

흑인영가와 인디언 민요를 토대로 하여 작곡한 것이다.

교향곡에서는 Largo 속도 잉글릿시 호른으로 연주되며,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향수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이 곡은 9개의 교향곡 중 마지막 작품으로 출판사 측의 실수로

<제5번>으로 알려졌다가 <제9번>으로 정정되었다.
일련의 <미국>적 이 작품은 이른바 독자적 스타일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이한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예를 들어

교향곡 "신세계로부터"는 다양하며 때로는 서로 모순된 해석을 부르고 있다.
즉, 제1악장 제3테마 속에 과연 스윙 로우, 스위트 차리오 Swing low,

sweet chariot 같은 흑인 영가의 선율로부터의영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드보르작이 실제로 인디언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지, 그의 착상

속에서 백인의 대중음악의 흔적을 볼 수 있는지 등 여러 가지로 의론이 분분하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향곡 제9번을 위시하여 미국 땅에서

씌어진 그밖의 작품은 5음음계를 즐겨 쓰고 있으며 리드미컬(싱코페이션)

하고 화성적인 표현이 가득 차있다는 점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이들 작품이 미국풍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Dvorak/Symphony No. 9 in E minor, Op. 95 Largo
Czech Philharmonic Orchestra. Ion Marin - conductor

 

Dvorak - Symphony No. 9 "From the New World" 전악장

Vienna Philharmoniker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Antonin Dvorak (1841 넬라호제베스, 보헤미아-1904 프라하)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곡가.
푸줏간 겸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가업을 잇기 위해 일을 배우는 한편, 즐로니체

도시의 오르간 주자로부터 최초로 음악의 초보를 배웠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857년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한 그는 동시에

오르간 주자, 피아노 주자로서의 기초적인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비올라 주자로서 Kavel Komzak의 오케스트라에 들어갔고, 댄스 음악이나 레스토랑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1873년 국민극장 직을 떠나 프라하의 성 아달베르트 교회 전속의 정 오르간

 주자가 되었고, Anna Cermakova와 결혼하여 6명의 아이를 낳았다.

는 장학금을 받아 빈에 가서 배웠으며 거기에서 브람스와 사귈 수 있었다.

브람스는 그에게 여러 가지 원조의 손길을 뻗쳐 주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자기가

거래하는 출판사인 짐로크에 그를 소개함으로써 드보르작의 모라비아 2중창곡,

슬라브 무곡집, 그리고 많은 교향곡이 짐로크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또 브람스는

그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게도 소개하였는데 뷜로는 이 음악가의

작품을 널리 세상에 알리고 온 유럽에 명성이 높아지게 힘써 주었다.

드보르작은 1890년에는 프라하에서 교향곡 제8번을 창작했다. 뉴욕 음악원을 창설한

  Jeanette Thurber여사가 미국에서 국제 전보로 초청한 것에 응하여 1892년부터

1895년에 걸쳐서 이 음악원에서 지도를 맡았다. 그의 미국적 작품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의 하나가 교향곡 제9번이다. 이 작품은 1893년 1월 1일부터 5월 23일

사이에 씌어진 것이다. 교향곡 제9번의 초연은 같은 해 12월 16일 카네기 홀에서

독일인  Anton Seidl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드보르작이 이 총보에 <<신세계로부터

Z noveho sveta>>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바로 초연 직전의 일이었다.

1895년 5월 프라하로의 귀로에 오른 뒤, 그의 작품과 그의 체코적 착상은 그를 당시

음악의 중심 도시 빈과 베를린으로 향하게 했고, 그는 거기에서 아카데미 회원으로

지명되는 등 명성을 떨쳤다. 국가적 명사가 된 그는 1904년 5월 1일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그의 음악적, 정신적 유산은 오늘날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가 사로잡혀

있던 좁은 전통의 테두리를 넘어서고 있다.
드보르작은 분명히 피아노 연탄용의 16개의 슬라브 무곡집을 작곡했고 그

오케스트라판은 그의 이름을 널리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그의 예술을 브람스의

고전주의 발자취에서만 찾거나 슈베르트의 내향적 순수함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드보르작이 작곡 기교에서 중요한 공적을 남기지 않았다 해도,

그의 넓은 범위에 걸친 작품을 그저 낭만주의의 지방적, 민족적 발전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드보르작은 진짜 체코의 근대 음악에서 교향곡, 실내음악의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그저 슬라브 민속음악의 멜로디나 리듬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본질을 깨지 않고 폭넓은 고전 형식,

즉 교향곡, 협주곡, 3중주곡, 4중주곡의 틀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기품있는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초기부터 그가 실내악곡 방면에 힘을 기울인 것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즉 op. 1의 2대의 비올라를 위한 5중주곡, 그것에 뒤이어 만든 최초의 4중주곡을
 들

수 있다. 9개의 교향곡을 통하여 그 중 초기의 4개의 교향곡은 사후에 유작으로 간행되고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 혹은 14개의 현악4중주곡을 통하여

 작곡가의 전모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들 기념비적 작품은 최근까지 부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으며 그 곡들의 출판은 겨우 근래에 이루어진 것이다.  
초기에는 단순한 착상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직인적 음악가였던 드보르작은

대기만성의 재능에 의하여 브람스와 어깨를 겨룰 만한 체코의 음악가가 되었다.

때로는 노스탈직하지만 결국은 낙천적인 그의 작품의 분위기가 그를 조국의

활기찬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는 변함없는 희망을 노래하는 보기 드문

시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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