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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영화·영화음악

John Williams & Itzhak Perlman / Schindler's List Theme

by DAVID2 2016. 5. 1.

John Williams & Itzhak Perlman / Schindler's List Theme


John Williams & Itzhak Perlman / Schindler's List Theme

절제의 아름다운 힘을 보다

필자가 LA에 체류 중일 때의 일이다.

한 친구가 이츠하크 펄먼(1945~ )이 이끄는 연주회가 LA필에서 열리는데 함께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친구의 초청을 받아들였는데, 그 예기치 않은 행운에 가슴이 벅차기까지 했다.

그동안 유명 심포니 지휘자가 이끄는 음악회나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회를 여러 차례 감상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펄먼과는 단 한 번도 인연이 없었다.

그런 그를 바이올리니스트로,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만나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약 90분에 걸친 연주회는 예상대로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런데 필자에게 그날의 클라이맥스는 아름다운 선율보다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 벌어진 마지막 장면에 있었다.

그것이 하나의 아름다운 서사시와도 같은 감동을 남겼다.


펄먼은 주커만과 함께 현대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다.

그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거동이 불편했다. 그래서 무대에 오를 때 소형 전동차를 이용했다.

전동차에서 지휘대로 자리를 옮길 때는 어렵게 몸을 가누어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은 숨조차 쉬지 않고, 묘한 긴장감이 연주장을 꽉 메웠다.

이윽고 연주회가 끝나자 펄먼은 다시 전동차에 의지해 무대를 떠났다.

관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낸 것은 물론이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듯 관객들의 박수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자 펄먼이 전동차를 타고 다시 나타나 답례하고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때 필자는 커튼콜이 서너 번 이어지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관객들이 갑자기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박수를 멈추고는 조용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순간, 필자는 아주 색다른 감동을 맛보았다.

공연장 분위기는 펄먼에게 몇 번이고 커튼콜 박수를 칠 만큼 고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를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는 ‘무언의 합의’를 했다.

그건 바로 절제의 아름다움이었다.

그와 동시에 필자의 뇌리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겪은 장면이 펼쳐졌다.

15세기 이후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온갖 핍박을 감내해야 했던 남아공은 당시

넬슨 만델라(1918~2013)라는 세계적 영웅의 지도 아래 신생 독립국으로 탄생한 지 몇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울러 남아공 사회에서는 식민 역사 청산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TV는 온통 과거 식민 정책을 규탄하는 프로그램만 있는가 싶을 정도였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TV에서는 때마침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 : Truth & Reconciliation Commission)’가

주관하는 청문회를 방영하고 있었다. 넓은 실내에서 피해자 가족과 수백 명의 참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안관

출신이라는 한 거구의 백인이 나오더니 육중한 군홧발로 무자비하게 원주민의 목을 짓눌러 살해하는 모습을 재연했다.

실로 끔찍하고 역겨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유독 한 장면이 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피해자 가족인 듯한 한 여인이 울분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잔뜩 가리고 있었다.

큰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 여인은 물론 방청석에 있는 누구 하나 고함을 지르거나 야유를 하지 않았다.

장내에서는 어떤 요동도 감지할 수 없었으며, 숙연하기까지 하였다.

자칫 집단적으로 흥분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큰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이 놀라움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필자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비이성적인 집단행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작금의 우리 사회는 역동적이고 자랑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걸핏하면 고성이 오가는 풍경만큼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공항에서든, 거리에서든, 국회에서든 모두가 제 목소리를 내느라 상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LA필의 관객들이 보여준 배려와 절제의 아름다움, 그리고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진행되는 남아공 청문회의 모습이

왜 이다지도 큰 부러움으로 다가오는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는 오늘이다.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중앙일보] [삶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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