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클래식

Marian Anderson / Ave Maria 외

by DAVID2 2016. 5. 8.


Marian Anderson / Ave Maria (Schubert )


역사상 위대한 여자 성악가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는
미국의 콘트랄토(여성 최저음 영역의 가수) 마리안 앤더슨.

그녀는 가난한 가정 형편과 흑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1925년 28세의 나이에 '뉴욕 필하모닉' 주최 신인 콩쿠르에서
많은 경쟁자를 뒤로하고 1등으로 합격하였습니다.
1935년 흑인 최초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섰고 이 공연을 본 거장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한 세기에 한 번 나올만한 소리를 가졌다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 워싱턴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진행한 무료 야외 연주회에서는

7만 5천여 명의 청중이 몰릴 정도로 그녀는 많은이들에게 유명해졌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서는 무대마다 빠짐없이 참석해 취재했던
한 기자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당신의 인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입니까?"

기자는 그녀가 공연을 마친 뒤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던 모든 순간을

함께했었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습니다.
"제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늙으신 어머니께
이젠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때였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가난했고 차별당했지만 꿈을 향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해설: 따뜻한 하루>


Marian Anderson  / Deep River




앤더슨은 필라델피아 빈민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백화점의 냉동실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죽자 그녀의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앤더슨의 재능을 알아본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레슨을 받을 수 있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음악학교 지원에 떨어졌다.

1925년 앤더슨은 성악가 주세페 보게티 에게서 레슨을 받게 되었고 같은 해 뉴욕 필하모닉

후원하는 콩쿨에 합격해 8월 26일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을 했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그녀는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1928년 카네기 홀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1930년대 전반에는 유럽 각국에서

116회에 달하는 순회 공연을 가졌고 1935년 흑인 최초로 잘츠부르크 음악제 의 무대에 섰다.

당시 이 공연을 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기자회견을 자청해 "그녀는 백년에 한 번 나올만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오늘 그녀를 만난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드린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여전히 앤더슨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차별 대우를 받았다. 1939년 앤더슨은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공연장 측에서 돌연 공연 취소를 통고했다. 앤더슨은 항의 표시로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무료 야외 연주를 가졌고

7만 5천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그 외에도 호텔에서 투숙을 거부하거나 식당에서 출입을 막는 등 차별을 겪었다.

 1941년 가장 자랑스러운 필라델피아 시민에게 수여하는 보크 상 수상자가 된 메리언은 상금 1만 달러로

장학 재단을 만들었다. 1943년에는 건축가 오르페우스 피셔(Orpheus Fisher)와 결혼했다.

195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지배인 루돌프 빙앤더슨에게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 무도회》의 점쟁이 울리카 역을 제의했다. 비중은 물론 출연 횟수도 적은 역이었지만 앤더슨은

그의 제의를 수락했고 그녀 이후 비로소 흑인 가수들이 오페라 극장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앤더슨은 1993년 조카 제임스 드프리스트 의 집에서 96세로 숨을 거뒀다.


1950년 리싸이털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