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클래식

Ignacy Jan Paderewski

by DAVID2 2021. 3. 23.

 

Paderewski, Piano Concerto in A minor, Op.17

1. Allegro

2. Romanza: Andante 17:25

3. Allegro molto vivace 27:15

Zelman Memorial Symphony Orchestra (ZMSO, Melbourne)

 Mark Shiell - conductor

Konrad Olszewski - piano

 


피아니스트가 꿈인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폴란드에서 태어났지요.
소년은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마침내 음악학교에 들어갈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얘야. 넌 손가락이 너무 짧고 굵구나. 피아니스트로선 성공하기 어려운 손이다. 
차라리 다른 악기로전공을 바꾸는 게 어떻겠니?"
교수들마다 이구동성으로 소년의 짧고 굵은 손가락을 지적합니다.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빨간 머리 소년은 여러 다른 악기들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소년의 음악적 열정을 만족 시켜줄 만한 악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부푼 꿈이 절망으로 바뀌는 시간들입니다.
 
어느 날 소년은 한 파티 모임에서 분위기를 돕는 반주자로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파티가 끝나갈 무렵 한 신사가 소년에게 다가옵니다.  
"얘야.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구나. 열심히 공부해라."
신사의 곁에 있던 사람이 소년에게 말합니다.
"이 분은 아르트루 루빈스타인 선생님이셔. 이분 말씀을 믿어도 돼."
루빈스타인의 격려는 소년의 꺼져 가는 꿈에 다시 불을 붙입니다.
쇼팽 이후 가장 뛰어난 폴랜드 피아니스트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격려를 받았으니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후 소년은 하루에 일곱 시간 씩 피아노에 매달려 연습을 합니다.
1875년부터는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학을 거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합니다.
1909년에는 다시 폴란드로 컴백해 모교인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지요.
 
그의 이름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Ignacy Jan Paderewski)입니다.
1892년. 파데레프스키가 무명의 젊은 시절 피아니스트로 활약할 때 일입니다.
스탠포드 대학에 다니던 학생 두 사람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자금 마련을 위해 마침 미국을 방문한
파데레프스키를  초청해 자선 연주회를 계획합니다.

2천 달러의 개런티를 약속하고 공연을 하기로 했으나 공연 수익금이 
1600달러 밖에 모이질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파데레프스키에게 우선 1600달러를 보내고 
나머지 400달러는 나중에 갚겠다고 양해를 구합니다.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파데레프스키는 1600달러 마저 학생들에게 돌려보내지요.
"어려운 학생들이 학자금에 쓸 수 있도록 하라"는 쪽지와 함께.


27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지요.  
당시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3개 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던 파데레프스키는 전쟁이 터지자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폴란드의 자유를 요청합니다.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1918년 폴란드는 완전히 독립을 이루어 폴란드 공화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리는 피아니스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빨간 머리 소년, 손가락이 짧고 굵어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조롱 받은 바로 그 소년이 자라
폴란드 초대 수상이 된 것입니다.
1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폴란드는 극심한 식량난에 부딪칩니다.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지요.
전쟁으로 초토화 된 토지에서는 곡식이 자라지 않습니다.
가뭄까지 겹치면서 식량난은 극심해 집니다.
백성들을 먹여 살리지 못한 무능한 총리라는 비난이 여기 저기서 거세게 일어납니다. 
폴란드 총리 파데레프스키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합니다만 
정치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결국 사퇴를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폴란드에 갑자기 2백만 톤이나 되는 엄청난 식량이 도착한 것입니다.
미 연방 식량구호국에서 보낸 것입니다. 
식량과 함께 도착한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27년 전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늦게마나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입니다.”
 
파데레프스키는 27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회상에 잠깁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두 청년이 떠오른 것이지요.
그들은 1600달러의 기금을 돌려 받으며 훗날 꼭 이 은혜를 보답하겠다 약속했습니다.

27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킨 겁니다.
스탠포드 대학생 중 한 사람은 훗날 미국의 31대 대통령이 된 허버드 클라크 후버였습니다.
후버는 당시 미국의 연방식량 구호국장이었구요.
소년은 자라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자라 어른이 됩니다.  

언제까지나 빨간 머리 소년으로 있을 것 같은 손가락이 짧고 굵었던 아이는 
한 나라의 총리로 성장하고 나라를 굶주림에서 구합니다.
학자금으로 곤란을 겪었던 대학생은 훗날 식량구호국장을 거쳐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격려를 생각합니다.
그의 진지한 조언과 격려가 없었다면 과연 폴란드의 미래는 어땠을까?  
한 쪽에는 손가락이 굵고 짧은 사실을 지적하며 아이의 장래를 가로 막는 어른들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구나, 칭찬해 주는 격려의 대가가 있었습니다.  
 
인생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 만남은 한 나라를 굶주림에서 구하기도 하고 
한 아이의 인생을 우뚝 세워주기도 합니다.

-옮긴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 1860년 11월 18일 ~ 1941년 6월 29일)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총리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에 폴란드 공화국의 탄생과 동시에

초대 수상이 되었다. 폴란드의 쿠리를후카에서 태어났다. 1872년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졸업 후 5년간은 모교의 피아노과 교수였고, 다시 1881년 이후는 베를린에서 수년간 작곡법등을 배웠으나,

피아니스트가 될 것을 결심하고 곧바로 빈으로 가서 레셰티츠키에게 배웠다. 1887년, 빈에서 독주회를

열게 되자 명성은 점차 높아가고, 1909년에는 바르샤바 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갔으며,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폴란드의 자유를 권유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가

독립을 맞자, 귀국하여 폴란드 공화국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수상직은 단 1년으로 사임하고,

다시 피아니스트로서 화려한 활동을 하였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도 살았으나, 다시 미국으로 가 뉴욕에서

객사하였다. 그는 알링턴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91년 폴란드로 유해가 옮겨져 바르샤바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명연주는 쇼팽의 폴로네즈,

마주르카, 녹턴 등이다.

 

파데레프스키 / Menuet in G

파데레프스키가 자신이 작곡한 미뉴엣 G를 연주하는 영상입니다.

1937년 영상이라 화질도 음질도 떨어지는 편이지만 귀한 영상이라 퍼왔습니다.

 

 

'음악 > 클래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Debussy / Clair de lune  (0) 2021.07.13
Antonio Vivaldi / The Four Seasons  (0) 2021.07.11
세기의 지휘자 Arturo Toscanini  (0) 2021.01.19
2021년 비엔나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  (0) 2021.01.03
Handel / Messiah-A Sacred Oratorio  (0) 2020.12.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