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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특별기획

20세기를 빛낸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 (Sergiu Celibidache)

by DAVID2 2013. 4. 21.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10인

 


20세기 최고의 지휘자에 관하여는 여러 단체와 기관에서 나름대로의 평가 기준과 투표로 선정한 내용이

 많이 있을 것이다. 어느것이 가장 객관적이고 권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소개하는 기획특집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는 우리나라의 원로와 중견, 그리고 신예급의 음악평론가와 칼럼니스트들을

포함한 선정위원단의 투표로 선정된 내용으로 1998년 4월 월간 '객석'에 소개된 내용으로
이순열, 송영택, 노승종, 선병철, 김범수, 황성호, 김춘미, 우광혁, 김방현, 임상순, 최갑주, 서동진,

김정순, 유윤종, 임화섭, 최은규, 이정환, 유형종, 이성일, 윤정열,김길영, 김상현, 이석열, 박성준,

서석주, 박제성, 박성수, 류태형, 이일후, 문옥배등 모두 30명으로 구성된 선정위원이 복수 투표와

점수제 투표를 혼합한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한 결과 선정된 20최기 최고의 지휘자 10인의 내용을 

기준으로 정리하였음을 밝혀둔다. 
여기서 소개되는 10인의 지휘자가 과연 금세기를 대표하는 10인가 하는데는 다소 이견이 있을수

있고 개개인이 좋아하는 지휘자가 일부 빠진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질수도 있겠지만 순위에 관계없이

금세기 많은 활동을 하였고 많은 사랑을 받은 지휘자들임은 확실하기에 이중 10명을

소개하고 그들의 지휘 모습을 보는것으로 만족하셨으면 한다.


'20세기를 빛낸 10인의 지휘자' 시리즈는 오래전 제가 운영하던 J Blog에 올렸던 내용을 다시 수정

보완하여 올리는 것으로 십여년전 자료에 근거를 둔것이라 최근의 상황과 다소 차이가 있을수도 있고

오래된 음원과 동영상이 많아 화질이나 음질이 많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음을 미리 양해 받고자 한다.

 

 

  


세르주 첼리비다케 (Sergiu Celibidache, 1912∼1996)  

 

 

 

루마니아의 이아시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한 지휘자. 처음에는 부쿠레슈티와

프랑스 파리에서에서 음악, 철학과 수학을 공부한 후, 나중에 피아노와 음악을 공부하였다.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은 마틴 슈타인케를 알게 된 것이었다.

슈타인케는 불교를 알게 된 후 첼리비다케의 여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완벽주의를 지향하여 연습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였으며, 녹음을 대단히 싫어했다.

그 때문에 유명세에 비해 생전에 음반화된 녹음은 극히 적다.

 

Debussy / Prelude l'Apres-Midi un'faune

Köln, Münchner Philarmoniker (1994)

 

Ravel / Bolero

The Dan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1971. )

 

Anton Bruckner / Symphony No 7 E major (전악장, 연주시간 80분)

Münchner Philharmoniker

 

 

첼리비다케의 죽음과 함께 단원들이 '쏴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지휘자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유독 첼리비다케에게만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첼리비다케는 '구시대적 지휘자'로서의 면을

다 부여잡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도 채 안되어 뮌헨 필은 그의 뜻을 어기고 녹음들을 팔아치웠다.
물론 그 녹음들이 첼리비다케에 대한 세기적인 재평가를 가능하게 했지만 그가 살아 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91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첼리비다케는 철학과 수학, 그리고 작곡과 지휘를 병행해 공부할 정도의 천재였다.

1936년 베를린에 이주해 전쟁중에도 이곳에서 계속 공부했다는 사실은 그의 독일문화와 베를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베를린 필의 바톤을 이어받는다. 그는 베를린 필 재건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데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베를린 필은 카라얀을 새 지휘자로 지명했다. 첼리비다케는 깊은 배신감으로

독일을 떠나 '방랑 지휘자' 생활을 하다가 61년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에 자리를 잡았고, 75년에 슈트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을 맡으며 독일로 돌아온다. 1979년 뮌헨 필의 음악감독이 된 그는 베를린에서 못다한 음악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레코딩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고집불통이던 첼리비다케가 자신의 의지를 꺾고 1992년 베를린 필과 화해의 연주회를 했던 것은 그가 유달리 베를린에

애착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여권에는 죽기 직전까지 거주지가 베를린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푸르트벵글러·카라얀, 그리고 베를린 필 사이에서 영욕과 카리스마를 불태웠던 첼리비다케의 죽음과 함께 한 시대는 저물었다.

단원들에게 소리지르고, 고집불통에다가 자신의 의도대로만 음악을 끌어나가며 전횡과 독재를 일삼았던 극단적인
카리스마. 독단적이고 전제적이긴 했으나 역시 믿고 존경할 만했던 예술가. 이는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들이 어느 정도

 공유했던 모습이었다. 이제는 오케스트라가 민주화되면서 지휘자보다 악단 중심으로 운영되어가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자료: 월간 '객석' 98년 4월 (제170호) 특집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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