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특별기획

20세기를 빛낸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by DAVID2 2013. 4. 22.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1930∼2004 )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1930년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로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Karl Ludwig Kleiber였으나 1935년에 가족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주하면서 이름을 카를로스로 바꾸었다.

 

Brahms Symphony No.4 (4악장)

Bava/ rian State Orchestra

 

 Strauss/Die Fledermaus 연습 광경(40세때의 Carlos Kleiber 지휘 모습 )

 

Beethoven Symphonies No.4 & No.7 (전악장, 연주시간 70분 )

Concergebouw orchestra Amsterdam

 

 

살아 있는 지휘자 중 아바도를 제치고 유일하게 선정된 클라이버.

(*주: 2004년 사망하였지만 이 기사가 쓰여진 1998년 당시에는 생존하였다)

과연 그의 매력은 무엇일까. 오페라극장에 무작정 뛰어들어 단계적인 도제과정을 거쳐 마이스터에 이른 최후 세대의

지휘자로서 역시 과거 거장들의 카리스마와 비슷한 면을 소유하고 있고, 레코딩을 철저하게 절제해 집중력이 탁월한

음반들만 소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장 일반적이다. 또한 신선한 리듬감각과 음악의 흐름과 밀착된표현력,

그리고 그것을 빚어내는 출중한 지휘 스타일에서 그의 매력을 찾기도 한다.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이름은 카를이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었던 그의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1935년 나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사임하고 가족들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적 취득과 함께 카를로스로 개명했다. 20세 되던 해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한 그는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취리히의 공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2년 후 견습지휘자가 되어 음악으로 돌아왔고 다시 2년 후

지휘자로 데뷔, 아버지 에리히가 사망한 56년 라인 도이치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30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일취월장했다. 1964년 취리히 오페라극장, 66년 뷔르템베르크 오페라극장, 68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등, 차차 유럽음악 중심부를 향해 수렴해 들어갔다. 70년대 들어서 그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바이로이트 음악제,

코벤트가든 오페라극장 등에서 지휘대에 설 때마다 찬사를 한몸에 받으며 완전히 아버지의 이름이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었다.

80년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고 82년에 빈 국립오페라 극장과 한시적인 계약을 맺기도 한 그는 89년과 92년에 빈 필

신년음악회를 지휘해 앞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냐는 추측을 불러 일으켰었다.

그리고 89년 카라얀 타계 당시 베를린 필 입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정작 클라이버 자신은 전혀 대중적인 인기나 레코딩엔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점이 그를 아끼는 많은 팬들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라고 했을 만큼

 레코딩을 싫어하는클라이버. 하지만 그의 음반은 성공작이 대부분이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베토벤 교향곡 4번 (오르페오), 빈 필과 함께한 5번(DG), 7번(DG),

브람스 교향곡 4번(DG) 등이 그가 지금까지 남긴 교향곡 음반 중 높은 평가를 받는 것들이다.

오페라로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한 베버의 '자유의 사수' (DG)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에서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DG),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영상물(DG) 등이 있다. 

 

<자료: 월간 '객석' 98년 4월 (제170호) 특집기사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