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은 길을 안내할 뿐이다
붓다가 답했습니다. “사람들은 라즈기르(인도의 지명)로 가는 길을 묻는다. 나는 그 길을 일러준다. 어디서 꺾고, 어디를 돌아서, 어디로 가라고. 그
런데 어떤 사람은 라즈기르에 도착하고, 어떤 사람은 가다가 포기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엉뚱한 지역으로 가고 만다. 여래는 다만 길을 안내할 뿐이다.”
사람들은 기대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직접 들으면 한 방에 ‘뻥!’ 뚫려서 깨달음을 얻으리라, 라즈기르로 순간이동이라도 하겠지 생각합니다.
붓다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다만 길을 안내할 뿐이라고.
#풍경2 : 개봉 첫날 조조 영화 ‘명량’을 봤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도심의 영화관인데도 젊은이들과 50, 60대 관객이 섞여 있더군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개봉 첫날 아침 일찍 영화관을 찾았을까. 유심히 살폈습니다. 거기에는 ‘목마름’이 있더군요.
그 목마름의 뿌리를 따라가 봤습니다. 그건 문제 투성이 나라에서 문제 투성이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는 문제 투성이 지도자들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순신’을 찾습니다. 현실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리더, 서글프게도 역사 속에서 찾는 겁니다.
‘명량’을 본 주위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너의 목마름은 뭐냐. 그들의 답은 뜻밖이었습니다.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격파한 전설적인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은 ‘멸사봉공의 리더십’이라고 했습니다.
더 큰 것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리더십, 그걸 가장 목말라 했습니다.
#풍경3 :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는 정확하게 길을 일러주고 몸소 보여줍니다.
“지도자는 한없이 자신을 낮춰라. 때로는 자신을 버리고 사람들을 품어라” “사람들 속에서 살아라. 그들의 냄새가 당신의 몸에 배도록 하라”
“정치인은 끝없이 소통하고, 소통하고, 소통하라.” 우리가 찾던 멸사봉공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은 기댑니다. 나의 상처를 만져주시오. 나의 문제를 풀어주시오. 우리는 교황에게 연필을 잡으라고 합니다.
한 보따리나 되는 대한민국의 숙제를 교황에게 들이밉니다. 우리 대신 문제를 풀라는 듯이 말입니다. 오죽하면 그럴까,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립니다.
그러나 붓다는 말했습니다. 길을 안내할 뿐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도 그렇습니다. 길을 안내할 뿐입니다.
연필을 쥐는 것도, 문제를 푸는 것도, 그 길을 가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누구도 그걸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선과 마주한 처지입니다. 세월호 참사와 윤 일병 구타사망 사건 등 풀어야 할 국가적 과제가
133척이 넘습니다. 누군가 칼을 빼서 휘둘러야 합니다. ‘2014년의 명량’에서 국가를 개조해야 합니다. 그 칼을 누가 뽑아야 할까요.
사람들은 묻습니다. 붓다는 왜 길만 안내하느냐. 귀찮아서, 아니면 힘들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붓다가 될 기회를 주는 겁니다.
붓다가 직접 손을 잡고 라즈기르까지 안내한다면 우리는 결코 붓다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근육이 없으니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을 일러줄 뿐입니다. 예수도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했습니다. 남의 죽음과 남의 부활은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이 죽고
자신이 부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작은 프란치스코’가 되고 ‘작은 이순신’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그런 ‘작은 이순신’이 수백만·수천만이
있다면 어떨까요. 133척, 아니 133만 척이라도 두렵지 않을 겁니다. 이제는 우리가 발을 뗄 차례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백성호의 현문우답/중앙일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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