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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여행 / 앙코르 와트 (Ankor Wat )

by DAVID2 2014. 5. 19.

지난주 약 7년전에 다녀온 하롱베이와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베트남 여행기를 올렸었는데

그때의 여행 일정은 베트남에 2박3일 그리고 캄보디에에 2박3일, 총  5박6일의 패키지 여행이였다.

오늘부터는 그 후반 2박3일인 캄보디아 여행기를 올린다.

 

Google에서 퍼온  Ankor Wat 전경 

 

2007년 10월3일 하노이에서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날라와 저녁을 한후 Ankorway호텔에

여장을 풀고 이튿날 아침부터 앙코르 유적지 관광에 나섰다.
씨엠립(시엠레아프, Siem Reap)은
프놈펜 북서쪽 약 300km 떨어진 Siem Reap강의 우안에 위치하고있는

앙코르 유적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있는 관광도시로 캄보디아어로 ‘패배한 타이’를 뜻한다고 한다.
앙코르 시대에 축조된 제방 도로상에 도시가 있으며, 크메르 왕국 멸망 후에는 타이령(領)이 되었으나,

프랑스령시대에 타이로부터 할양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앙코르 와트에서 4km쯤 떨어져 있어 앙코르와트의 현관 구실을 하고 있으며 방콕에서 캄보디아로 가는 육로가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개방되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면서 아시아의 주요 관광지로 급부상하기 시작한 곳이다

 

Google에서 퍼온 Ankor Wat 배치도

 

앙코르 유적은 씨엠립 주변으로 약 64Km의 면적에 걸쳐 산재해 있는 여러 유적을 총칭하는 것으로,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군의 대표적인 하나의 사원이다. 
8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건축된 이 유적군은 캄보디아의 역사, 종교, 문화, 예술이 총체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건축 예술의 걸작으로 캄보디아의 국기에 새겨질 만큼 캄보디아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이 중 하나이다. 앙코르 와트는 힌두의 비슈누에게 바쳐진 사원이였고, 앙코를 톰의

사원들은 대부분 대승불교를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들여온 자야바라만 7세에 의해 지어진 불교사원이다.

 

 

앙코르 와트 입구에 늘어선 석상들

 

앙코르 와트 입구

 

앙코르 와트의 거대한 불상

 

 

 

 

앙코르 왕국의 초기인 8세기에는 앞서 받아들인 힌두교를 중심으로 사원과 주요 건축물들이
조성되었으나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앙코르의 역사상 이 자야바르만 7세가 통치하던 12세기와 13세기가 가장 전성기로서 번영과
풍요를 이루었으며, 당시의 인구는 100만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숫자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닐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인구를 가진 거대도시였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암족, 참족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받기 시작하고, 더구나 왕실 내에

현재의 나병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 때문에 크메르인들은 이곳을 버리고 타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사실, 그토록 융성했던 앙코르 왕국이 왜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갑자기 정글 속으로
몇 백년동안이나 사라져 잊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확실한 해답이 없는 상태이지만, 시암(Siam)족 등 외세의 침입에 의한 멸망이라기 보다는
전염병의 창궐 때문이라는 설이 한층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프랑스의 탐험가에 의해 1860년 발견될 때까지 이 거대한 유적군은 수 백년간 정글에 파묻혀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로 황폐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1856년부터 1953년까지

거의 100년간 프랑스에 의해 신탁통치를 받게 됨으로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벽면마다 가득한 조각과 조형들 그리고 과거에는 많았던 보석들은

당시 문화의 융성과 조각 건축 기술을 반영해주고있다.

 

 

 

 

 

앙코르 문화의 초기인 9세기와 10세기의 건축물에는 벽돌문화가 도입되었고 11세기 초기에
이르러 석조문화로 바뀌게 되는데, 주로 사용된 돌로는 사암(沙岩)과 수성암(水性岩)이었다.
사암은 황토색과 분홍색 등 파스텔 색상의 돌로서 부드러워 조각하기 쉽고 습기에 강하므로
외벽의 정교한 조각을 하는데 많이 애용되었으며, 수성암은 매우 부드럽지만 일단 공기와 접촉
하게 되면 매우 단단해 지는 특성이 있으므로, 기초나 장식이 필요치 않은 부분에 사용되었다.

 

 

전체 유적의 70 %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 혹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1995년부터 인도의 건축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유네스코에서 모든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사원을 유유히 거니는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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