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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양식/문학·예술

Van Gogh 그림 감상 (4)

by DAVID2 2012. 5. 25.

 

 

 
Two Cypresses
Saint-Rémy
Oil on canvas June 1889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1889년 고흐는 반복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면서

그 해 5월 생 레미(Saint Remy)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입원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 감시원을 동행한 채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가 생 레미에서 발견한 중요한 모티브는 병원에서 바라보이는 밀밭과 싸이프러스 나무였다.
밭이나 산을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싸이프러스 나무는
그에게 있어서 마음의 번민에 위안을 주는 희망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는 이 모티브로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싸이프러스 나무와 함께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붓터치를 이용한 표현은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을 이룬다.

반고흐는 비평가 알베라 오리에(Albert Aurier)에게 이 모티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싸이프러스 나무는 시골 풍경의 전형입니다. 해바라기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이미지로 나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이지요.”

실제로 해바라기가 아를에 머물던 시기의 그가 느꼈던 심적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싸이프러스는 생 레미 시기의 그의 심리를 대변하는 매개체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산도, 하늘도, 대지도, 모든 요소들이
살아서 꿈틀대는 사이프러스 나무에 맞추어 호흡하고 요동치는 것처럼 보인다.
불타오르는 듯한 격렬한 붓질로 그려진 나무와 무성하게 갈린 들판의 풀, 휘몰아치는 하늘 등
각각의 요소가 나름대로의 강렬함을 띄고 있으면서도
반 고흐의 억제된 색조 표현을 통하여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고흐역시 이 작품을 매우 아꼈으며 ‘내가 그린 가장 명석한 작품’이라며 스스로 평가하기도 했다.


 

The All-Knight Café at Arles
Oil on canvas September 1888
Yale University Art Gallery New Haven CT USA

고흐와 고갱이 자주 가서 압상트를 즐기던 카페 드 라 가르 (Cafe de la Gare)이다.

“카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할 수 있고 미칠 수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
'밤의 카페'를 통해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
부드러운 분홍색을 핏빛 혹은 와인 빛 도는 붉은색과 대비해서, 평범한 선술집이 갖는 창백한 유황빛의

음울한 힘과 용광로 같은 ‘인간의 끔찍한 열정’을 표현하고 싶어 지옥 같은 분위기를 부각하려 했지.”
-1888. 9. 8-
의도적으로 피와 같은 붉은 색과 어두운 노란 색, 당구대의 초록색‘등을 대조적으로 사용했다.
‘색채는 열렬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관적인 그의 견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L'Arlésienne Madame Ginoux with Books
Oil on canvas November 188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고흐는 늘 고뇌하였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살아가고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동생에게 짐이 되는 죄스러움을 갚을 길이 없어서...
그래서 그의 영혼은 늘 가난했고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고흐는 자신이 늘 동생에게 신세져야 한다는 사실을 미안해했다.
언젠가 좋은 값에 그림이 팔려 테오에게 진 빚을 다 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편지에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현은 늘 빠지지 않았다.
편지에서 고흐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내 영혼을 줄게’라는 표현으로 전했다.
고흐의 그림은 고흐의 영혼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테오는 형을 존경했고, 늘 걱정했고, 형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여유롭진 않았지만 돈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내 영혼을 줄게.“
“형과 나는 몸은 둘이지만 한사람이야. 형은 정신이고, 나는 육체라구.”

한편의 드라마 같은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그의 형제들의 고통과 번민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The All-Knight Café at Arles (Portrait of Madame Ginoux)
1890
Paul Gauguin 作
 


고흐와 고갱은 지누 부인(드 라가르 카페 주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 그림으로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흐는 탁자에 몇 권의 책이 펼쳐진 우아한 지누 부인을 그리지만, 고갱은 싸구려 술 압생트 병과 술잔이 놓여있고

뒤에는 고흐가 아버지처럼 좋아하고 따르는 우체부 룰랭이 창녀들을 희롱하는 모습을 그렸다.
술에 취해 탁자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종종 그림을 같이 그리는 고흐의 친구라고 한다.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Oil on canvas January 1889
60 x 49 cm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London UK
 


고흐는 자해 사건 이후 귀에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두 점의 자화상에 담았다.
그 중 하나인 이 그림은 다른 것에 비해 더 미묘하고 성찰적인 느낌이다.
발병 후 2주가 지나 그린 이 그림은 차분하고도 기품 있는 고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강한 빛 아래서 자신과 침착하게 대면하고 있는 고흐는 그가 아직 훌륭하게 살아 있음을 주장하는 듯하다.
이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화가이기 때문에 겪은 발작이었기를 바란다. 하루하루 내 머리는 평온을 회복하고 있다."
테오에게 이렇게 썼지만 실은 그의 불운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흐가 귀를 잘랐던 사건-
고흐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갱이기에 비용을 절감하고 작품 구상의 의논생대로도 좋을 것 같아
당시 같이 춥고 배고팠던 고갱에게 함께 기거하기를 고흐의 여러 번의 요청 끝에
드디어 10월 고갱이 아를에 도착했다.
가난했지만 마흔 살 고갱과 서른다섯 고흐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고 서로를 아껴주었다.
몽펠리에로 파브르 미술관에서 쿠르베, 들라크루아의 소장품을 함께 감상하기도 하고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생활은 성격적인 충돌로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를 지배하고픈 욕망과 자신의 예술성을 라이벌에게 과시하고픈 욕망,
고흐의 격한 분출 등... 예술에 관해 의견이 달랐던 그들은 격렬하게 논쟁하기 시작했고,
반 고흐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고갱이 그를 버릴 것만 같은 공포감에 점점 휩싸였다.

1888년 12월 23일 실의의 빠진 반 고흐는 날카롭게 고갱과 대립했다.
패닉에 빠진 반 고흐는 호텔을 떠나 창녀촌으로 달아났고, 왼쪽 귀를 잘라 휴지에 감싼 다음

레이첼(Rachel)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면서 “이 오브제를 잘 보관하라”고 부탁까지 했다.
한 편, 고갱은 그길로 아를을 떠났고 다시는 반 고흐를 보지 않았다.
‘노란 집’에서 같이 지낸지 약 두 달 만이었다.

동생 테오가 고갱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형을 방문했다.
1889년 1월, 화가 폴 시냑이 방문해 반 고흐가 다시 ‘노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잦은 환각과 발작, 망상으로 병원과 집을 번갈아 다녀야 했다.
30명의 마을 사람들은 반 고흐를 ‘빨간 머리의 정신병자’라고 부르면서
탄원서를 제출했고 경찰은 그의 집을 폐쇄했다.

그 사건 이후 반 고흐는 반복되는 극심한 정신 착란으로
1889년 4월 스스로 생 레미(Saint-Remy)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찾아가 입원하게 된다.

37년간의 짧은 삶 속에 힘겹던 그를 지탱해주던 두 축이었던 고갱과 테오.
177통의 편지에서 고갱의 이름이 605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고갱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고흐였다.
동료 예술가로서 존경하고 마음이 맞는 구세주이자 스승이며 형과 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고갱과의 불화는
고흐를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고통의 깊은 수렁에 빠트렸으며 자기 귀를 자르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비화했다.

이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최초의 발작이었다.
그의 짧은 인생의 참담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생 레미 정신병원의 병실
1889. 4

“이곳으로 오길 잘한 것 같다. 동물원 같은 곳에 갇힌 미친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보노라면,
막연한 불안이나 공포가 사라진다.
그러면서 정신병도 다른 질병과 같은 병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1889-
1889년 4월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흐는 프로방스의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스스로 입원하여 1년 남짓 병원의

빗장이 쳐진 독방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며 감사자와의 동행 하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

빈센트 형에게
“형이 생 레미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니, 그리고 아를에서보다 더 편 안한 느낌이라니 정말 기뻐.
하지만 형이 그곳에 너무 오래 머물지는 않길 원해.
주변에 그렇게 많은 정신이상자들이 있는 게 그리 유쾌하진 않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건 형의 생활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서 한편으로 형을 자유롭게 해주는 곳을 찾는 거야.”
-1889. 5. 22 테오-

 

 

 Old Man in Sorrow
Oil on canvas 1890.5.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이곳 환경이 나를 말할 수 없을 만큼 짓누르기 시작했어.
이런, 어느새 참고 지낸 지도 일 년이 다됐구나.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여긴 너무나 지루하고 슬픈 곳이란다. … 비록 마음에서 우러나와 따뜻하게 보살펴 준다 해도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으며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삶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자유를 희생하고 스스로를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그리고 아무런 방해 없이 작품에 몰두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상태야.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1890년 5월-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감금되어 있을 때 비참한 심정으로 쓴 편지다.
테오에게 부탁하여 1890년 5월 고흐는 생 레미의 병원에서 나와
가셰 박사가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로 떠난다.

 

 


Street in Auvers-sur-Oise
Oil on canvas 1890
73 x 92 cm
Museun of Finnsh Art Ateneum
 


“오베르는 무척 아름답단다. 그중에서도 요즘에는 보기 드문 오래 된 초가가 그렇지. …
거기에는 정말로 심오한 아름다움이 있어.
이런 곳이야말로 진정한 시골이라 할 수 있을 거야. 매우 특색 있고 회화적이거든.”

-1890년 5월-
병원에서 퇴원하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와서 느낀 새롭고 경이로운 풍경에 대한 편지다.
“그림에 대해 좌절하지 않는 정열이 있고 자연의 색에 대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말일세.
수많은 난관이 닥치더라도 예술가는 이곳에서 버틸 수가 있다네. 난 좀 더 오래 머물 생각이야.”

“자연은 처음에는 언제나 화가의 접근에 저항을 하지.

하지만 자연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화가라면 그 정도의 저항에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그런 저항이야말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니?
그리고 자연과 진정한 화가는 그 근본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란다.
확실히 자연은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이지만 그래도 화가는 자연을 움켜쥐어야 해.
그것도 아주 단단히 말이야. 그렇게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면
이제 자연도 조금 유순해지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거란다.”

 

 

 

 Four Cut Sunflowers
Oil on canvas August-September 1887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고흐의 상징이자 태양의 상징, 태양과 노란 색에 미쳐버린 화가 반 고흐.
1888년 동생 테오(Theodorus van gogh 1857-1890)에 보낸 편지의 내용 중

"자냉(Goerges Jeannine)에게 작약이 있고 쿠스트(Ernest Quost)에게 접시꽃이 있다면
나에게는 해바라기가 있다."

그가 얼마큼 이 꽃에 매료되어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1888년부터 아를(Arles)의 작업실에서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 연작은 훗날 그에게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을 안겨 주었다.
1888년에 제작된 <해바라기>는 생명력이 넘치며
마치 태양을 쫒아 절규하는 듯한 노란색으로 표현 되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한 자신의 봉사와 고통이 부족하다고 울던 고흐가
몇 년 만에 파리에서 가장 시끄럽고 난잡한 술집에 앉아
신을 저주하는 사람들과 밤새도록 어울리던 시기로 압생트에 과하게 취한 시기이기도 하다.
압상트에 취하듯 노란 색에 미쳐있었다.

 

 

 The House in Auvers-sur-Oise
Oil on canvas 1890
72 x 60.5 cm
Boston Museum of Fine Arts USA
 


“저는 계속 고독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격렬한 색채, 맹렬한 붓질과 몇 번씩 덧바른 물감, 소용돌이, 고통과 불안, 외로움 등 빈센트의 내면의

고뇌에 찬 삶의 통찰을 나타내는 이 모든 것이 그의 그림을 통하여 가슴 뭉클한 정신적, 심리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다시 정신적 고통으로 힘들어진 때이다.

 

 

Irises
Sait-Rémy
Oil on canvas May 1889
J.Paul Getty Museum Malibu CA USA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그림이다.
해바라기, 아이리스, 히아신스, 체리블로섬, 아카시아, 들장미, 아네모네등 수많은 꽃들을 모델로 삼았던

고흐는 자연과의 끊임없는 씨름 후에, 태양을 의지해서 자라나는 꽃들과 자연을 연인처럼 사랑했다.
고흐는 표면적으론 삶에 대해 부정으로 일관하는 사람 같았지만,
사실 그 속엔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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