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의 양식/문학·예술

Van Gogh 그림 감상 (2)

by DAVID2 2012. 5. 23.

 

 

 

 Iries
Oil on canvas 1890
92 x 73.5 cm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반 고흐가 1888년부터 몰두했던 주제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붓꽃이 불안한 영혼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정원의 화단에 핀 붓꽃을 흥미롭게 관찰하였고
이를 관념적으로 추출하여 캔바스 위에 되살렸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한 편의 시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구나.”
"지금은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단다.
끔찍했던 발작도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사라졌고 말이야.
난 이곳에서 차분한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마지막 붓 터치를 다듬으며 지내고 있어.
녹색 배경에 장미가 있는 그림을 하나 그렸고 커다란 보라색 붓꽃 다발이 있는 그림을 두 점 그렸어.
바탕을 분홍색으로 칠한 그림은 녹색과 분홍색, 보라색의 조합으로 부드러운 조화를 느낄 수 있지.”

눈이 부실정도로 레몬 빛의 노란색 배경은 순수한 감청색과 양홍색이 섞인 보라색의 붓꽃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1987년 뉴욕에서 동시대 회화 중 최고가에 판매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Autumn Landscape with Four Trees
Oil on canvas November 1885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고흐가 테오에게 보내 편지 중 하나에 이런 말이 남아 있다.
‘아름다운 것에 가능한 한 많이 감탄하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에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어.’
건강하지 못한 몸과 마음,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이처럼 진실과 정직과 아름다움을 쫒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삶을 탐구하고자 수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다름 화가들의 그림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열심히 공부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두 발로 직접 걸으며 세상을 보았다.
세상을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슬퍼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과 글에는 권위 의식도, 가식적이거나, 어떤 유파의 냄새도 없다.
이것이 반 고흐의 내면이다.

 

 

 Harvest
Oil on canvas June 1888, 73 x 92 c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고흐가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한 후에 그린 그림이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나는 최고의 걸작이란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자유롭게 그린 그림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래도 ‘자연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이,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충분하지 않다’
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구나.
가장 뛰어난 상상력은, 동시에 그러한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은 말이야,
사람을 바보로 만들 만큼 솔직한 모습의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란다.”
-1885년 10월-

 


 

A Pair of Shoes Paris 2nd half
Oil on canvas 1886, 45 x 37.5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노동자들이 신는 구두를 그린 이 그림은 100킬로미터도 넘는 먼 거리를 걸었던 고흐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반 고흐는 자신이 좋아했던 화가 쥘 부르통을 만나고 싶어 120킬로미터 가량을
걸어서 그의 집 앞까지 갔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 문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이 그림에는 고되게 노력했으나 보람 없는, 삶의 비통함이 배어 있다.

“나는 가난할 테고,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이며, 한 사람의 인간, 자연인이 될 것이야.
자연에 등을 돌린 인간, 끊임없이 어떤 지위나 걱정하며 자연에서 멀리 떨어진 인간은
오! 결국 뭐가 희고 뭐가 검은지 분간조차 못하게 될 것이야.
이런 이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들과 정반대 편에 서 있어. ”

-1883년-

 

 

 

Olive Orchard
Saint-Rémy
Oil on canvas 1889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USA
 


“그림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여야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것과 같다”
인내심과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순간적으로 포착한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던 고흐다.
 
"흔들림 없이 감정과 완전히 일체를 이루는 붓놀림을 구사하는 것은 감정을 실어 음악을 연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야."

-1888년 9월-
 

 

 

 

 Sorrow
drawing 1882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있다.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 주는 힘이 아니겠니...?”

이 작품의 모델은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자,
5세의 딸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창녀가 된 Clasina Maria Hoornik 일명 시앤이라는 3살 위의 여인이다.
고흐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그녀를 돌보던 시절에 완성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힘찬 데생으로 묘사된 여인의 모습에서 가슴 저린 슬픔이 호소력 있게 전달되고 있다.

“그녀에게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거든.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하게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1882년 1월-
“너는 나에게 돈을 줄 수는 있어도 아내와 아이를 줄 수는 없다.”
고 테오에게 편지했듯이 시엔과의 동거는 고흐가 뭔가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즉  홀로서기의 시작이다.
부모의 반대로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그녀의 아이를 사랑하며 그녀를 만날 때 임신 중이었던 그녀를
출산까지 도와줬고그녀를 모델로 그리면서 행복했었을 고흐.
하지만....그해, 시엔은 7월에 아들 윌렘을 낳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반 고흐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녀와 아이들을 만나는 것을 막았다.
반 고흐는 약 3주간 성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그해 여름 처음으로 유화로 그림을 그렸다.
시엔과는 약 1년 넘게 같이 생활했지만 1883년 가을에 헤어졌다.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고 생각했으나, 시엔은 어려운 살림으로 인해 다시 창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시엔의 딸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아들은 그녀의 남동생에게 각각 맡겨졌다.
후에 아들 윌렘이 12살이 되어 어머니 시엔을 방문했을 때, 시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윌렘의 아버지는 20년 전 만났던 화가이며 이름은 반 고흐다.”

 

 

 The Starry Night
Saint-Rémy
Oil on canvas June 1889, 73.7 x92.1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NY USA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것으로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이후
생 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것이다. 고흐에게 밤하늘은 무한함을 표현하는 대상이었다.

“오늘 아침 나는 해가 한참 뜨기 전에 창문을 통해 아무것도 없고 아주 커 보이는 샛별 밖에 없는 시골을 보았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듯 눈부시다.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떠있고 달과 별은 그 빛으로 부옇게 무리 져서 광채를 더욱 발한다.
휘몰리듯 그려진 짙푸른 밤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전면에는 반 고흐가 좋아했던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반 고흐 자신의 인용인 “오래된 숲의 선들처럼
비틀린 선”처럼 하늘을 향해 불타오르며 잠자듯 교회가 있는 수평을 이룬 작은 마을은
‘깊은 시간’의 존재를 드러내며 평화롭게 고요하고...
살아있듯 꿈틀대는 화려한 소용돌이의 춤 같은 장대한 밤의 시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찬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왜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1888. 6-


 

 

 Drawbridge with Carriage
Oil on canvas March 1888
Rijksmuseum Kröller-Mülle Otterlo Netherlands
 


반 고흐의 사랑
빈센트의 애정관은 어머니의 사랑을 대체하려는 무의식적인 열망이라 할 수 있다.
죽은 형에 대한 슬픔에 잠겨 빈센트를 외면한 어머니와 엄격하고 권위적인 목사였던 아버지와의
불화 속에서 이름까지 물려받은 ‘죽은 형의 대체된 아이’로 불운하게 태어난 고흐이기에 어머니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빈센트의 마음속에는 완벽한 사랑에 대한 강박과 안락한 가정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어머니 사랑을 대신해 어머니와 비슷한 존재를 갈망하게 되고, 슬픔에 잠겨 있거나 고통 받는 여인들에게
이끌렸던 반 고흐의 사랑은 대체로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늘 사랑을 갈망했지만, 그는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사랑에 서툰 그의 일방적인 마음이 원인이 되기도 했고, 이루어 질 수 없는 상실,
변해버린 마음 등 늘 안정을 찾아,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이루지 못한다.

런던에서 아트 딜러 구필의 구필 앤 씨(Goupil & Cie) 화랑에서 화상으로 근무할 때,
하숙집 딸인 위젠(Eugenie Loyer)의 사랑도, 위젠이 다른 사람과의 약혼으로 거절당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이요 아픔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절망하며 자신을 고립하기 시작했다.

 

 
Haystack in Rainy Day
Oil on canvas 1890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Kee와의 사랑
1881년 4월, 얼마 전 과부가 된 사촌 케이 보스 스트릭커(Kee Vos-Stricker)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였는데 그녀는 반 고흐보다 7살이 많았고, 8살 된 아들이 있었다.
예술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반 고흐 어머니의 언니 요하네스 스트릭커(Johannes Stricker)의 딸이었다.

그녀에게 프러포즈했으나 그녀는
“아니, 절대로, 절대로 Nooit, nooit, nimmer”라는 말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녀를 만나기 위해 편지를 쓰고,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녀를 죽은 남편의 추억에서 구해 가정을 이루겠다는 열망으로, 빈센트는 그녀의 의사에 관계없이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애정을 퍼부었고, 그는 램프의 불에 왼손을 갖다 대고 손바닥을 지지면서까지
다시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위젠도, 케이(Kee)도, 아버지 도, 친척들도 모두 날 버리고 이제 하느님을 위해 내 몫은 그림만이 남았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께서는 왜 날 버리시는가? 신은 없다.”

-1882년 5월 14일-
고흐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Majolica Jar with Branches of Oleander
Oil on canvas August 188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마르호트와의 사랑
1884년 가을, 반 고흐보다 12살이나 많은 이웃집 딸인 마르호트 베게만(Margot Begemann)은
종종 그가 그림 그리는 곳을 따라다녔다. 그녀는 반 고흐를 사랑했다.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반 고흐는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두 집안의 반대로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르호트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된다.

반 고흐가 사귄 여자 중 비교적 참한 여성이었던 마르호트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여 빈센트를
배신했음에도 반 고흐는 아이 아버지라는 부당한 비난을 받아야했다.
이 사건 이후로 1885년 3월에는 아버지가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그는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주로 이루어지기 힘들거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연애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수치와 망신을 당한 채 끝나 버리고 말지.”

그 후에도 <감자먹는 사람들> 속의 인물 17살의 스틴, 탕부랭 식당 여주인 세카토리,
마지막 사랑인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까지.....

많은 사람과 사랑을 꿈꾸고, 부분적으로 기쁨을 느끼긴 했지만,
꾸준한 사랑을 얻지 못하고 사랑을 찾아 헤매는 고흐였다.
고흐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고, 사랑이 곧 예술의 원천이라 믿었다.

“여자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한 늙지 않는다.”
1874년 7월 31일 런던에서, 테오에게 사랑을 꿈꾸는 그가 동생에게 쓴 편지 의 일부다.

"사랑이란 거미줄처럼 약하단다. 오직 성실함 위에서만 밧줄처럼 강해진다."
거리의 여인 시엔과의 이별 후 테오에게 전한 말이다.

자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랑을 갈망하며 모든 사랑에 헌신적이었지만,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랑은 없었다.
자기의 상처와 같은 상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오로지 짝사랑뿐인 그는 더욱 절망의 늪에 빠진다.

테오가 부인 요한나에게 보낸 편지 중
“형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을....”
하며 애통해 한 동생이다.

'마음의 양식 > 문학·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Van Gogh 그림 감상 (4)  (0) 2012.05.25
Van Gogh 그림 감상 (3)  (0) 2012.05.24
Van Gogh 그림 감상 (1)  (0) 2012.05.22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0) 2012.05.14
어머니가 아들에게   (0) 2012.05.0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