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사월 초파일을 앞두고 남한산성의 사찰들을 방문할 때에 남한산성의 행궁도 관람하였다.
행궁은 그간 두어 차례 가본적이 있고 블로그에도 몇차례 올렸지만 2012년 5월 24일 부터 복원되어
공개된지 3년째를 맞아 이제는 제법 초목도 우거지고 제 모습을 잡아가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총 11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중 가장 최근에 인정된 곳이기도 하다.
행궁이란 왕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랗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의 행궁만
20여개였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인조 14년(1737)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이곳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한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1624년(인조 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으로,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 때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축조하였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의 하나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 등 총 3단 227칸으로 이루어진 행궁이었으나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다.
《남한지(南漢誌)》에는 숙종(肅宗)·영조(英祖)·정조(正祖)가 영릉(寧陵)을 참배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대에는 지방관인 유수(留守)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11월에는 이 행궁터 서쪽 바깥 담장과 안쪽 담장 사이에서 초기 백제 때의 토기조각이 발견되고, 2개의 저장용
구덩이 시설이 확인됨으로써 남한산성이 백제 영토였음이 증명되었다.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0년간 252칸을 215억원을 들여 복원하고 2012년 5월 24일 부터 공개되고 있다.
정문인 한남루는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 22년 (1798)에 광주 유수 홍억이 건립하였다.
(앞쪽 기둥 아래쪽의 돌 4개는 실제 옛것을 발굴해 사용하였고 뒷쪽의 4개는 새로히 제작하였다고 함
정문에서 행궁 내부로 들어서는 외삼문 중 북행각
(문이 3개인데 중앙은 왕만 사용하고 오른쪽은 문사들, 왼쪽은 무사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행궁 안쪽에서 본 남한루
외삼문 옆의 담
외삼문을 들어서서 또 지나는 문
남한산성 역사 사진전 (이 사진들중 일부는 외국인 선교사등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행궁의 복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일장각과 그 앞의 통일신라 건물지
외행전
이곳을 발굴시 발견된 신라 시대의 건축 잔해 일부를 이곳에 전시해 놓은 통일신라 건물지
남한산성을 이루고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이름으로 삼은 일장각
외행전과 내행전의 사이의 굴뚝
상궐 북행각
내행전 문
내행전의 어좌
상궐 남행각
내행전 건물과 후원
상궐남행각 뒷편으로 보이는 나무
내행전
재덕당
재덕당 앞의 멋진 나무
이위정
이위정 (좌)와 좌전중 영녕전
좌전중 정전
좌전은 유사시 종묘에 있는 선대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만든 건물로 영녕전(좌)과 정전(우)로 이뤄져 있다
재덕당(중)과 좌승당(우)
행궁 밖에서 본 행궁의 일부
통일신라 와적지
행궁 밖에서 본 한남루
건축중인 인화관
인화관
행궁 입구의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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