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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클래식

멘델스존 /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Op.64

by DAVID2 2012. 5. 8.

 

 
Mendelssohn/ Violin Concerto e minor Op.64  멘델스존 /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Op.64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Op.64 1악장
Violin: Hilary Hahn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음악사상 가장 부유했으며 완벽한 음악적 조기교육을 갖췄던 작곡가이다
멘델스존의 음악은 모두가 행복이 가득한 음악뿐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에서도 1 주제가 행복해 취한 여인의 멜랑꼬리 같은
느낌이며, 2 주제도 선정적인 노래조의 가락이다. 2개의 주제가 응답하며
변주되는 분위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몹시도 행복해 취하게 한다. 


 

 



Violin Concerto e minor Op.64 (전악장)
Janine Jansen, Violin
BBC Orchestra
Night of the Proms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독일 낭만파가 낳은 가장 뛰어난 협주곡으로서 기념비적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만약 멘델스존이 이 바이올린 협주곡 단 1곡밖에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은 영세토록 전해졌을 것이다. 고금의 바이올린 협주곡 중 베토벤의
작품을 바이올린 협주곡의 왕이라 한다면, 멘델스존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여왕의 자리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멘델스존이 이 E단조의 작곡에 착수한 것은 1838년(29세)의
일인데, 완성을 본 것은 6년 후인 1844년(35세) 9월이 었다. 빨리 작곡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가 이토록 오래 걸린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우선 착수하기 전 해에 세실
샤를 로테 소피 장르노와 결혼해서 다망한 신혼생활에 묻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라이프찌히 음악원 창설을 위해 동분 서주해야 했던 것, 버밍검 음악제와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지휘자로서 연주활동에도 몸을 쪼개야 했던 것 등 차분히 일에 몰두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멘델스존은 이 곡을 작곡함에 있어서 당시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콘서트마스터로 있던 페르디난트 다비드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
이것은 브람스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함에 있어서 요아힘의 충고에 힘입은
바 컸던 것과 비슷하다.
부드러운 낭만적 정서와 균형잡힌 형식미는 멘델스존의
 모든 작품의 공통된 특징이지만,
이 곡에서처럼 잘 조화된 작품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멘델스존이 우리에게 남긴
최대의 유산이다.
초연은 완성된 다음해인 1845년 3월 13일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있었다.
독주는 물론 다비드가 맡았고, 지휘는 당시 건강을 해쳐서 프랑크푸르트에
가있던 멘델스존 대신에 가데가 맡았다.
가데는 당시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부지휘자였다.

영국의 스탠딜 베네트는 베토벤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비교하면서
[아담과 이브 같다]고 말했다. 그 화려함이나 섬세함, 그리고 부드러움에 있어서
베토벤의 협주곡보다 멘델스존의 협주곡이 훨씬 여성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곡은 고전적 형식에 의해 씌어졌지만, 전체적으로 로맨틱하고 도처에 새로운
시도가 엿보인다. 예컨대 3개의 악장을 계속해서 연주토록 한 것이라든가,
제1악장
전개부와 재현부 사이에
그 스스로 카덴짜를 써넣는 따위로
당시로서는 상용하지
않던 대담한 시도들이었다.
악기편성: 독주 바이올린,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2, 현 5부.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1809 ~ 1847 (독일 작곡가.)

조부는 독일의 소크라테스라 불린 계몽주의 철학자 M. 멘델스존, 부친은 은행가
A. 멘델스존으로 유대인의 명문가계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미술·문학에서 타고난
재질을 발휘했고, 교양있는 양친을 비롯해 베를린의 뛰어난 예술가·학자들의 지도를
받아 재능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1816년에는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 그 사실을
명시하기 위해 멘델스존 바르톨디라는 이름을 가졌다.
19년 이후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고, J.S. 바하의 대위법과 W.A. 모차르트의
고전적 양식을 이상(理想)으로 한 교육을 받았다. 21년에 J.W. 괴테를 방문한 이후에
5회의 방문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다. 25년에는 파리로 가서 직업음악가로서의 길을
선택했는데, 젊은 그의 사상에 큰 영항을 준 인물은 J. 파울·W. 셰익스피어·괴테
등이었고, 《현악 8중주곡 내림마장조(1825)》의 스케르초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발푸르기스의 밤>에 의거하고 있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존경심은 서곡
《한여름밤의 꿈》을 낳았다. 20세 때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거의 1세기 만에
부활·상연해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영국 여행의 인상은 《핑갈의 동굴》, 교향곡
제 3 번 스코틀랜드》로 결실되었다.
30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교향곡 제4번《이탈리아》를 낳았다. 33년 뒤셀도르프에서의
니더라인음악제로 큰 성공을 한 그는 그곳 음악감독의 지위를 얻고 《메시아》를 비롯한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상연하였고, 그 영향에서 오라토리오 《성바울》과 피아노곡집
《무언가》의 대부분을 작곡하였다. 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의 제 5 대
지휘자로 취임하여 뒤셀도르프에 한정되었던 음악생활을 독일의 중심적 존재로
까지
높였다. 바흐를 비롯한 오래된 음악의 소개와 함께 그 시대 사람들의 작품 연주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고, R. 슈만·N. 가제·L.H.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39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목사의 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얻었다.
43년 라이프치히음악원 설립에 공헌하였고, 스스로 원장직도 맡았는데, 성(聖)토마스교회
합창대장인 M. 하우프트만·슈만·F. 다피트·C.F. 베커와 같은
당대 일류 음악가를
교수진으로 맞는 데 수완을 발휘하였다.
라이프치히에 본거를 두고 뒤셀도르프·런던·
베를린 등 각지에서 지휘자로서, 또한
피아노와 오르간 명연주가로서 활약을 계속했는데,
47년 5월에 누이의 죽음에
따른 충격 때문에 같은 해 11월 4일에 라이프치히에서 죽었다.
말년의 명작으로는 《바이올린협주곡 마단조(1844)》, 오라토리오 《엘리아(186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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