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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양식/문학·예술

명화산책 (52) 김정희의 세한도

by DAVID2 2016. 8. 7.

 

그림 읽어주는 여자 홍옥희가 해설하는 명화 산책, 김정희의 '세한도'를 

개합니다.  KTV가 6월 9일 방영한 그림 읽어주는 여자의 내용입니다




김정희 / 세한도





조선 말기의 사대부 서화가 완당 김정희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사의체문인화이다. 1840년 윤상도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

귀양 온 김정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인 우선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가의 발문이 화면 끝부분에

붙어 있으며, 이어서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고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 장악진·조진조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와 함께 김석준의 글과 오세창·이시영

배관기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추사는 제자처럼 아끼던 역관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고, 이상적은 청나라에 이를 가지고

가서 추사의 옛친구를 비롯한 명사들의 글을 그림에 이어 붙인 저지에 받은 것이다. 그 후 세한도는

이씨 문중에게서 떠난 후 130여년 동안 유전을 거듭하다가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 ~ 1948)[1]에게 들어갔다. 세한도는 일제 말에 후지쓰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1981)의 노력과 재력에 힘입어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다.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 6월 3일(1786년 6월 28일)

~ 철종 7년(1856년) 10월 10일(1856년 11월 7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본관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

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그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0년 생부 김노경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1853년 풀려났다.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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